불교의 역사

인도문화권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 전파된 불교는 또다시 동쪽의 중국에 전래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유교나 노장사상 등의 고유사상과 융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불교는 동아시아 전 지역 즉 한국, 일본, 발해,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동아시아 불교권의 공통점은 한역 대장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역 대장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고 교리의 연구나 발달도 한역경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불교가 공통적이다.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특징은 통불교(通佛敎) 즉 종합불교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원효의 불교사상은 화엄, 법상, 삼론, 정토가 서로 융합되고 회통된 것이다. 이러한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은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어 보조국사 지눌은 교선(敎禪)일치의 종풍을 수립하고 교학과 좌선을 하나로 종합시켰다.

한국불교의 정치적, 사회적 특징은 호국불교(護國佛敎)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대략 4세기경으로서 왕실의 귀의를 받아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신라 진평왕 23년에 시작한 법회에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가 있다. 백고좌법회(百高座講會)는 <인왕반야바라밀다경>의 설을 따라 내란과 외환 등의 악운을 물리치고 왕실과 국가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행한 법회였고 팔관재회(八關齋會)는 재가신도가 팔계(八戒)를 받고 하루 낮과 밤 동안 그것을 지키는 불교의식이었으나 신라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명복을 빌거나 토속신을 섬기는 의식으로 행하여졌다.

이러한 이념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것은 원광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이후 이러한 호국 불교적인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시대에는 침입한 몽고에 대항하여 적국항복의 원이 담긴 대장경이 조판되었다. 부처님의 가호를 기원하며 조판된 <고려대장경>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사명 등의 승려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워 신라의 호국정신이 조선시대까지 그 맥을 이어간 것이다.

불교의 역사

고대 삼국은 주로 자연신을 섬기는 고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하늘과 해님을 대상으로 했던 천신이나 명천(明天)을 환인(桓因) 또는 천제(天帝)라는 불교적 인격신으로 정착시켰으며, 또 창공이나 영성(靈星) 등의 숭배가 인간수명과 화복(禍福)을 주재한다는 북두칠성 신앙으로 되고, 하천이나 해수 및 농경에 관계된 모든 신의 숭배는 용왕신 신앙으로, 산악숭배는 산왕신 신앙으로, 가옥신은 조왕신앙 등으로 정착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연신적 신앙이 불교화 되고 모든 신과 이에 대한 신앙이 불교신앙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기존의 고유 신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전개된 것이다.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삼국의 많은 학승들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활동을 하였고, 또 그곳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혹은 중국학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삼국시대에는 삼론(三論)을 비롯한 여러 교학의 학자가 많았으며 화엄, 법화, 열반 등의 경전도 성하였다. 특히 백제에서는 독자적인 율전(律典)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불교는 삼국에서 성대하게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전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왔으며, 이듬해 왕은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391년에는 왕이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하였고, 이어 광개토왕은 즉위 2년(392)에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96년에는 동진에서 담시(曇始)가 불경 수십(數十)부를 가지고 요동에서 교화한 후 삼귀계(三歸戒)를 주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장수왕 때 중국으로 간 승랑(僧朗)은 그 곳에서 삼론학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세웠고, 섭산 서하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명성을 들은 양 무제는 우수한 학승 10명을 뽑아 승랑(僧朗)에게 수학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 승전(僧詮)이 가장 뛰어나 그의 법을 이었다. 595년에 일본으로 간 혜자(慧慈)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曇徵)은 불교와 오경(五經), 색칠하는 법 그리고 종이와 붓 만드는 법을 전하였다. 또 652년에 일본으로 간 혜관(惠灌)은 백제 관륵의 뒤를 이어 일본 제2대의 승정이 되었고, 삼론학을 널리 전파하여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전등사 대웅보전

 

백제의 불교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에서 옴으로써 불교가 전해졌다. 그는 이듬해 남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 그 후 392년에 왕은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교하였다. 526년에는 인도에 유학 갔던 겸익(謙益)이 범본 논서와 율부를 가지고 인도 승려 배달다(倍達多)와 함께 돌아왔다. 율부 72권이 번역되자 담욱(曇旭)과 혜인(惠仁) 두 승려는 그에 대한 주석서 36권을 저술하였다. 552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고, 577년에는 불경과 율사를 일본으로 보냈으며, 602년에는 관륵(觀勒)이 천문, 지리, 역서 등을 전하였다.

 

전남 영광 불갑사
백제 최초 사찰

 

신라의 불교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왕명시대가 찾아왔다.

 

불교의 호국관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국사(佛國寺) ·흥국사(興國寺) ·흥왕사(興王寺) 등을 축조한 것이나, 황룡사9층탑의 축조 및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 등은 왕실호위와 국가수호의 호국신앙의 표시였다. 또한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仁王經)이 존중되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비는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 ·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승직제도인 국통제(國統制)가 진흥왕 때 수립되어 불교의 정치참여를 촉진시켰다. 또 현세구복적 성격면에서는 아들의 출산이나 치병(治病)을 기원하는 등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는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정치적 고문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서역문화 수입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문화 개발에 활력소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 개발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학문과 사상의 선각자가 되어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신라인의 도덕적 요강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도 실증된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영 안정사

통일 후 중대의 불교는 나 ·당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유학생 ·유학승의 노력으로 단순한 호국종교의 역할을 벗어나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종교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결과 5교(敎)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이때 원효는 통일신라의 불교를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종파간의 대립의식이나 형식을 배격하고 일심(一心) ·진여(眞如)와 통일 ·화합의 화정사상(和靜思想)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형식화 ·귀족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며 대중화하는 정토신앙을 확립하였다.

 

5교가 귀족들의 환영을 받은 데 대하여 정토신앙은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토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않더라도 극락세계에 생왕(生往)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면, 고해에서 벗어나 서방의 정토(淨土:극락)에 귀의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손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토신앙은 통일신라의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의 현실도피적 염세경향을 반영해준 불교 내세관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불국사 대웅전

8세기 이후 신라 사회에 정치적 권위가 추락되자 불교계에도 불경과 계율을 앞세워 중앙귀족과 연결된 5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대두되어 지방 호족과 연결, 9산(九山:禪宗)의 종파가 이룩되었다. 하대의 선종사상은 교리보다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과 도야로서 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이 옳다고 생각한 종파로서 문자를 떠나(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요시하였다.

 

이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 성행한 선종은 중세(中世)의 지성을 성립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호족세력의 사상적 이념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해주(海州) 수미산파의 개창자 이엄(利嚴)이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의 스승이 된 것 등으로 미루어 선종사상은 고려 왕조 개창의 정신적 계기가 되었다. 선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중국문화의 폭을 넓혀주었고, 한문학 발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고유 신앙과 결합하면서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전성기는 30대 문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이며, 그 이후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정(和諍) 그리고 무애(無碍)사상을 제창하였고, 665년에 당에서 귀국한 혜통(惠通) 은 밀교를 전하였으며, 671년에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널리 전파하여 해동화엄의 초조가 되었다. 691년에 귀국한 승전(勝詮)은 당의 현수 법장이 지은 <화엄경탐현기> 등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성덕왕 때에는 봉덕사를 건립하여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인왕도량 (仁王道場)을 베풀었고, 또 751년에는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였다.

경덕왕 14년(755)에는 분황사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이 당시의 신앙형태는 특정한 부처나 보살에게 국한되지 않고 여러 불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예배하거나 아미타불, 약사여래 또는 미륵이나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신앙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다. 그와 함께 약사여래, 아미타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을 사방불(四方佛)로 신봉하는 사방불신앙도 나타났다. 이처럼 경덕왕 때부터는 교학연구보다는 불보살에 대한 영험담이 성행하여 불교는 점점 타력신앙적인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또 경덕왕 때에는 왕실이나 귀족들을 위한 사찰이나 불탑, 불상 등의 조성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하였는데, 특히 왕실의 원찰에는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거나 국가에서 관료를 파견하였다.

낙산사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고려시대의 불교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성격이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말에 전래되고 수용된 선(禪)은 고려에 와서 독자적인 전재를 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완성되었고, 현재 조계종의 원류가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신라에 없었던 천태종이 성립되었고, 선종(禪宗)과 함께 교종(敎宗)도 발전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태조의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되어 불교의식이 가장 성행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율을 어기는 일부 승려들이 민심을 현혹시켰고, 불교교단의 확대와 함께 지나친 사찰의 건립은 많은 피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신라 말에 이르러 귀족 간에 왕위쟁탈이 계속 일어나 왕실의 세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틈타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민중은 거듭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백제의 옛 영토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북방에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다. 신라는 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려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고, 이듬해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수덕사 대웅전

 

태조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건국이념과 국가신앙으로 정착시켰는데, 이는 호국신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또 도선(道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의거하여 많은 사찰과 불상, 탑을 건립하였다. 태조는 도선의 사상을 그대로 신봉하여 즉위 원년(918)에는 팔관회를 개최하여 연례행사로 규정하였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그 곳에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유언으로 훈요십조를 내렸는데 이 가운데 3조가 불교에 관련된 것이다.

제4대 광종은 즉위 2년(951)에 태조와 그의 왕비인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봉은사와 불일사를 창건하였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채택하면서 이에 준하여 승과제도를 실시하였다. 광종 또한 태조와 마찬가지로 호족을 비롯한 적대세력을 저지하여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963년에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구호기관인 제위보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귀법사의 균여(均如)와 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 세력에 반발하는 민중을 포섭하여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기반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968년에는 자신의 죄를 소멸하려는 뜻에서 홍화사, 유엄사, 삼귀사를 창건하였고, 이 해에 혜거(惠居)를 구사에, 탄문을 왕사에 임명함으로써 국사와 왕사를 제도화하였다. 특히 당시 불교계의 큰 과제였던 선교 융합을 시도하였으나 광종 이후에는 중단되었다.

제8대 현종은 12세에 승려가 되어 숭교사, 신혈사에 머물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라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였다.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여 제작된 5000여권을 부인사에 보관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승려들을 궁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飯僧)이 연례행사로 베풀어졌다. 이러한 불교행사와 대장경 판각 등은 국난을 극복하려는 호국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제10대 정종 12년(1046)에 처음으로 경행(經行)이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경행(經行)이란 질병이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불교행사로서 대중을 세 무리로 나누어, 맨 앞 받침대에 <인왕반야경>을 올려놓고 걸어가면, 그 뒤에서 승려들이 <인왕반야경>을 독경하고, 그 뒤에는 관리와 백성들이 뒤따르면서 개경의 거리를 도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불교의식이 성대해지면서 점차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11대 문종 10년(1056)에는 부역을 피할 목적으로 출가하여 돈을 모으고 농축업을 하는 승려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환속시키고 모든 사찰에는 계율을 잘 지키는 승려들만 머물도록 하는 칙명을 내렸다. 문종 19년 에 왕은 넷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문종 때에는 수많은 법회나 불사가 성행하여 불교의식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승려들의 사치와 부패도 심하여 일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의천은 선종 2년(1085)에 송으로 가서 천태와 화엄을 배우고 이듬해 귀국하여 흥왕사에 머물면서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나라 안팎의 불서를 수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숙종 2년(1097)에 자신을 위해 건립된 국청사에서 처음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또한 숙종 4년(1099)에는 처음으로 천태종 자체 내에서 승과를 실시하였고, 숙종 6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함으로써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하나의 종파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미신적 주술로써 민심을 현혹시키는 승려들이 계속 늘어났고, 반승을 비롯한 기복적인 불교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제17대 인종 때에도 기복, 주술적인 불사만을 빈번히 행하여 궁정에는 승려들이 가득하였고, 사찰에서는 자주 연회를 베풀었다. 또 서경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왕의 고문에 추대된 묘청(妙淸)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의거하여 서경천도를 주장하였으나 개경의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묘청 의 난을 계기로 개경의 문신들이 득세하여 무신이 차별을 받게 되자 의종 24년(1170)에 이의방은 정중부, 이고 등과 합세하여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켰다. 명종 4년에 이의방은 승려 종참과 정중부의 아들 균에게 살해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보조국사 지눌은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경>을 중심으로 강의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종의 전통이 되었다. 지눌의 제자인 수선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慧諶)은 <선문염송>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공안 1125칙을 불경이나 조사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요지를 제시하고 송(頌)을 붙인 것이다.

제23대 고종 재위 46년 동안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 불교가 더욱 성행하였다. 현종 때에 판각하였던 대장경 경판이 고종 19년(1232)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리자 16년에 걸쳐 다시 새겨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제25대 충렬왕 이후 몽고의 지배 하에서 자주적인 발전 역량을 상실했던 불교계는 격심한 타락과 분열, 대립의 양상을 보였다.

제31대 공민왕 때에 보우(普愚)는 임제종을 도입하여 선문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고 그와 동시대의 인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는 경한(景閑)과 나옹(懶翁)이 있다. 경한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하였고,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알려진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저술하였다. 보우의 문하에서는 혼수, 찬영 등이 배출되었고, 나옹의 문하에서는 자초, 축원, 법장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어 조선 초기 불교의 명맥을 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불교를 비판, 배척하는 배불(排佛)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론과 실제의 두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불교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당시 불교도의 윤리적 타락에 관한 비판은 조인옥에 의해서도 신랄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불교도들의 물욕과 음욕을 밝히는데 집중되었다.

고려 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배불(排佛)의 기세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층 거세졌다. 태조는 조구(祖丘)를 국사에, 자초(自超)를 왕사에 임명하고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승려의 증가를 막기 위해 도첩제를 엄격하게 행하였다. 태종은 배불정책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궁중의 불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그 이외의 사찰을 모두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또 왕사와 국사제도를 폐지하고 11종의 종단을 7종으로 축소시켰다. 세종은 다시 7종을 통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하였고, 승록사를 폐지하고 흥천사를 선종의 본사로, 흥덕사를 교종의 본사로 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이에 불교는 활기를 띠는 뜻했으나 성종, 연산군, 중종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명종 때에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고승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선교양종을 부활시켜 선종의 본사를 봉은사로, 교종의 본사를 봉선사로 하고, 승과제도를 다시 시행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탄압이 계속되자 불교는 산속으로 운둔하여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무학 자초(無學 自超)는 조선시대의 최초이자 최후의 왕사이다.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元)에 가서 인도 승 지공과 고려 승 나옹을 만나고 135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나옹의 선법을 전수하고 여주 고달산에 초암을 짓고 은거하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에 임명되었다. 자초의 법을 계승한 승려가 득통 기화(得通 己和)이다.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 출가하였고, 주로 화암사에서 수행하였다. 1414년에는 평산 자모산 연봉사에 작은 거실을 마련하여 함허당(涵虛堂)이라 칭하고 <금강강오가해설의>를 강의하였다. 특히 <현정론>을 저술하여 불교를 배척하던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반박하였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여기서 말하는 근대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꾼 1897년에서 8.15해방까지로 한다. 조선조 500년간 억압을 받았던 불교계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또 위축되었다. 개항이 이루어진 다음 해인 1877년부터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일본 각 종파의 승려들은 국내 곳곳에 포교당과 사찰을 건립하고 국내의 승려들을 포섭 또는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먼저 호의를 베풀어 환심을 사기 위해 파격적인 방법으로 조선시대 불교탄압의 상징이었던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하였다. 1895년 4월에 일본당국과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조치는 국내의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에게 큰 호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을 완화하기에 이르렀고,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찰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취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정부는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워 조선불교의 총 종무소로 하고 전국 13도에 각각 하나의 중심 사찰을 두어 업무를 총괄하였다.

1902년에는 정부가 사찰을 관리하기 위해 궁내부 소속으로 관리서를 설치하였다. 관리서에는 사사관리 세칙을 제정하고, 대법산, 중법산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을 총괄하였다. 대법산은 국내 중심 사찰을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중심 사찰로서 16개의 사찰을 지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사찰 및 승려는 국가 행정의 범위 안에 있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 소속의 관서였기 때문에 공무원이 사무직에 임명되어 여러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혼란과 공무원의 부패로 인하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04년에 관리서와 대법산 제도는 폐지되었다.

1906년에 이보담, 홍월초 등이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창설하고,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에는 전국 승려대표 52명이 원흥사에서 모임을 갖고 정토교 일색이었던 불교연구회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종단을 세울 것을 결의하고 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결정하고 원흥사에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원종(圓宗)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과 원종(圓宗)을 합병하기로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국내 승려들은 1911년 조계산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세웠다.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금정산 범어사로 옮겨 서울의 원종(圓宗)과 대치하면서 태고 보우 이래의 임제종 법맥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1년 6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을 제정, 반포함으로써 원종(圓宗)과 임제종은 없어지고 말았다. 불교교단 또한 사찰령 시행세칙에 의거하여 30본산으로 형성되어 종단의 이름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30본산, 곧 30개의 교구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결여되어 포교 및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해 1915년에 서울의 각황사에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 연합사무소는 30본산간의 사무만 집행했을 뿐, 전국 사찰과 승려를 통제할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통제를 위해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을 설립하였다.

 

군산 동국사 - 일본식 사찰

고대인도 사회와 종교

인도 문화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이들을 아리아인이다. 그들이 인도에 침입하기 이전에 인도 대륙에는 원주민 즉 드라비다인과 문다인이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인들은 원주민들을 정복하여 동쪽 방면으로 또는 남쪽 방면으로 쫓아버리고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그들에 의하여 처음 형성된 문화가 베다종교이며 바라문교라고 한다. 아리아인들은 인도내륙지방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는 원주민들과 혼합하여 아료드라비다와 같은 새로운 종족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여 부족사회에서 점차 계급사회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또 아리아인들의 전통적인 베다 종교의 관습을 무시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지비카, 쟈이나, 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교를 발생시키는 기반을 형성하였다.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이주하여 최초에 작성한 성전을 베다라고 한다. 베다라는 것은 '안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종교적 지식을 표현하며 그 지식을 편찬한 성전의 명칭이 되었다. 베다의 기본 부분인 삼히타(Samhita, 本集)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 <리그베다>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펀잡 지방에 정착하였을 때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의 현상과 그 위력, 구성요소, 추상적인 관념 등을 신격화하여 이루어진 신에 대한 찬가를 집성한 것이다. 베다의 종교에서는 제단을 설치하여 신에 대한 제물을 바치고 많은 신들 중에서 오직 한 신을 그 곳에 모셔 기원하였으나 현세 이익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펀잡 지방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은 사제를 중심으로 하는 씨족제 농촌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찬가를 작성하여 정확하게 외고 복잡한 제사의식을 틀리지 않게 집행하기 위하여 고도의 전문 지식과 훈련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사제의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에 의하여 작성된 많은 문헌을 브라흐마나(Brahamana, 祭儀書)라고 한다. 이것은 삼히타에 덧붙이는 것으로서 제사 의식의 규정과 신학적 설명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신화나 전설도 들어 있다. 그 연대는 기원전 1,000년에서 800년경이지만 <리그베다 >를 제외한 다른 세 가지 베다(<사마>, <야쥬르>, <아타르바>)도 같은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부족민의 승리와 복지를 기원하는 제사가 존중되었기 때문에 사제의 지위는 높아져 신과 같은 존재로 보였다. 또 정치적인 일을 처리하고 병사를 통솔한 왕족도 독립적인 계급을 형성하였으며, 목축, 농업, 공예 등의 생산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은 사제나 왕족 아래서 서민 계급을 형성하였다. 이 세 계급에 대하여 원주민이나 그들과 혼인한 사람들은 노예로서 힘든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네 계급 (바루나, 四姓)이 성립된 것이다.

 

 

고타마 붓다

붓다(Buddha)는 동사의 어근 budh(자각하다, 깨닫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각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 불(佛), 부도(浮屠) 등으로 음사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인물로 불교의 개조이다. 고타마 붓다는 석가(釋迦)라고 하는 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 혹은 석가모니세존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줄여서 석존 또는 석가라고도 한다.

붓다의 전기를 조직적으로 집성한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는 경전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들은 모두 붓다가 죽은 뒤 수세기를 걸쳐 작성된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현재 남아있는 것은 니카야(Nikaya, 阿含)와 비니야(vinaya, 律)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니카야 중 <숫타니파타>와 비니야 중 <파티목가>에 포함된 단편적인 기사들이다.

불전문학은 붓다의 탄생지를 룸비니 동산이라고 하고 있으나 <숫타니파타>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최대의 보배인 저 보살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간세계에 태어났다. 석가족의 마을에 룸비니의 지방에’라고 전하고 있다. 붓다의 탄생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태내에 들어갔다는 전설은 <숫타니파타>에 나온다. 또 그 때에 그는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탄생일은 북전(北傳)에 의하면 4월 8일이며, 남전(南傳)에 의하면 베사가월 (인도력으로 2월)의 보름날이다. 보살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그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했다는 전설이 <숫타니파타>에 나타나 있다. 아시타 선인은 아이를 안아 올린 후 그 뛰어난 모습을 보고 환희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 왕자는 깨달음의 최고봉에 이를 것이다. 이 사람은 최상의 청정을 볼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게 될 것이며, 법륜을 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청정행은 넓게 전해질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궁궐을 떠났다고 한다.

 

 

초기 불교 교단

율장의 대품(大品)에 의하면 붓다가 도를 이룬 뒤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행하였을 때 그들은 믿고 받아들여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에서 상가(敎團)의 성립을 뜻한다. 그 후 제자의 수가 점차 늘어나서 60명에 이르렀을 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유행(遊行)하라’고 설법하셨다. 이것은 불교 상가의 초기 생활양식을 한 마디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사문들에 의하여 유지되어 온 공동체를 ‘상가’ 또는 ‘가나’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본래 공화국 정치 형태인 부족국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초기불교의 사문을 석자사문(釋子沙門)이라고 하여 그의 가르침을 석자의 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가 당시 유행자의 일파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가(敎團)는 지역적으로 자연 발생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현전승가(現前僧伽)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소규모의 원시 상가에서 유일한 스승과 법에 귀의하는 교단으로 전개되어감에 따라 횡적인 유대로서의 사방승가(四方僧伽)의 이념을 형성시켰다. 인도의 기후는 매년 6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몬순의 영향을 받아 많은 비를 내려 강이 넘치고 홍수를 일으킨다. 이러한 자연조건은 출가자의 유행생활에 불편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마철에는 유행을 중지하고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비구들은 걸식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주지는 도시나 촌락의 근처에 있었다. 처음에는 안거를 위한 일시적인 정주지(定住地)에 불과했으나 석 달 동안의 단체 생활에 의하여 공통의 의식이 정해졌고 또 식량을 모아서 기진(寄進: 물품을 스스로 바침)하게 되었기 때문에 행걸(行乞)의 규정이 필연성을 잃어 이윽고 주처(住處)나 원(園)은 반영구적인 정주지의 성격이 되었다. 주처(住處)는 비구에 의하여 세워진 초가 암자였으나 원(園)은 일반적으로 도시 한 복판 혹은 교외에 있는 낙원(樂園), 과수원, 화원 등이었다. 이것이 소유자에 의하여 완전히 상가에 바쳐졌을 때 그것은 승원(僧園)이라고 하였다. 승원(僧園)은 구조적으로 정사(精舍), 평복옥(平覆屋), 전루(殿樓), 누방(樓房), 굴원(窟院)의 다섯 종류가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도 정사(精舍)와 굴원(窟院)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정사(精舍)는 평지에 벽돌이나 돌로 지어졌으나 굴원(窟院)은 고원의 바위에 구멍을 뚫거나 뚫려있는 굴을 사용하였다.

 

 

부파 불교의 전개

붓다가 입멸했을 때 강 유역은 마가다와 고사라의 2대 왕국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는 과정에 있었으나 마가다는 드디어 강가 평원에 지배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마가다의 왕통은 하루양가, 샤이슈나가, 난다, 마우리야의 여러 왕조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마케도니아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리스의 전 국토를 통일한 알렉산더 대왕이 중동에서 소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석권한 후 서북 인도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326년이었다. 그들은 인더스 유역에 지배권을 확립한 후 서방으로 군사를 철수하였다.

당시 강가 평원은 난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는 서북 인도에서 그리스의 군사적 지배권을 몰아내고 난다 왕조를 무너뜨린 후 마우리아 왕조를 창설하였다. 기원전 305년 세르고스 1세 때 니가드루는 인더스강을 건너서 알렉산더에 의하여 정복되었던 영토를 다시 찾으려고 했으나 전쟁에 이익이 없을 것 같아 찬드라굽타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양쪽 왕조의 사이에 우호관계가 유지되어 세르고스는 메가스데네스를 사신으로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에 머무르게 했다. 찬드라굽타에 의한 24년 동안의 통치 후에 그의 아들 빈도사라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빈도사라의 25년 동안의 통치 후 그의 아들 아쇼카가 왕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찬드라굽타 이래 국가통일의 위업을 이어받아 인도사상 최대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가링가 정복에 의하여 생긴 비참한 결과를 통탄하며 무력에 의한 정복에서 법에 의한 정복으로 정책을 전환시켰다. 그는 통치의 이념 및 재세중의 사업을 법칙(法勅)이라 하여 바위나 돌기둥에 새겨두었다.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는 정법(正法)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원하여 비구들이 실천해야 되는 7종의 법문을 명각(銘刻)시키고, 과거의 여러 왕들이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즐겼던 오락을 그만두고, 법의 순례를 행하고, 바라문과 사문들을 찾아서 보시를 하고, 지방의 인민에게 법을 교계(敎誡)하고 그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불교의 성지에 세워진 탑을 찾아 공양하고, 제국의 변경이나 그리스와 이집트 등에는 법의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다. 또 당시 불교교단은 분파의 경향이 있었으므로 파승가(破僧伽)를 경계하는 법칙을 산치, 사르타트, 코삼비에 명각(銘刻) 시켰다. 아쇼카왕은 제3결집을 단행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넓히기 위하여 인도 각지에 전도사를 파견하였다.

 

 

힌두이즘 형성과 대승(大乘)의 흥기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후 수세기 동안 소국(小國)이 할거하는 정치사정과 빈번한 이민족의 침입은 자급자족의 경제를 목적으로 하는 폐쇄적인 농촌사회를 형성하였다. 또한 슝가 왕조나 샤다바하나 왕조 등에 의한 바라문교의 보호정책은 바라문교의 부흥을 재촉하였다. 따라서 농촌사회가 규제되고 바라문의 사용어인 산스크리트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또 지방 부족신앙이나 속신(俗信)이 베다의 교의체계의 근원이 되어 바라문교와 토착민과의 결합이 한층 가속화되었다. 통일국가 성립 이후 이러한 경향은 심해져서 바라문교 자체가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바라문교의 변질은 신관(神觀)의 변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베다 신들의 위치는 전락하여 더없이 무력한 존재로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브라흐마는 고대 우파니샤드에서 확립되었던 우주의 원리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것으로 자주 최고신으로서 숭앙되고는 있으나 개성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두 신(神)에게 그 위치를 빼앗기게 된다. 여기에 대하여 시바와 비슈누는 민중 신앙을 근거로 하여 덧붙여졌다. 시바가 인도 종교의 고행의 면을 나타내는데 대하여 비슈누는 온화한 인간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비슈누와 시바의 숭배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했으나 기원후 새로이 여러 종류의 뿌라나가 작성되어 판데온(萬神殿)이 확립되기에 이르러 위의 세 신은 일체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하여 예부터 내려온 바라문교는 토착의 신앙을 흡수하였으나 그 요소가 오히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변질된 종교를 힌두이즘이라고 한다.

 

 

대승교학(大乘敎學)의 성립과 밀교(密敎)의 대두

데칸 지방은 마우리아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왕조 멸망 후 사타바하나 왕조의 안드라 왕국이 독립하여 도읍을 푸라티슈다나에 정했다. 기원전 1세기에 샤다카루니왕은 가링가 왕국을 멸망시켜 광대한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 후 1세기에는 서 데칸지역이 석가족의 침략을 받았으나 고다미푸트라왕은 다시 영토를 회복하여 3세기말까지 왕국을 유지하였다. 이 왕조는 적극적으로 바라문교를 도입하였으나 불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로마제국과의 무역에 의한 상인계층의 번영을 기반으로 하여 서 데칸에는 나나가도, 나시쿠카루라 등 다수의 굴원이 만들어지고 상좌계 특히 독자부의 거점이 되었다. 또 안드라의 동부에서는 아마라바티 등의 승원을 중심으로 대중계의 여러 파가 번영하였다. 크리슈나강의 중류에서는 나가르주나가 창건한 나가르주나곤다의 승원이 있었으며 대승과 대중계 여러 파의 거점이 되었다.

나가르주나는 데칸 고원의 비다르바 출신으로 처음 바라문의 교학을 배웠으나 케시미르에 유학하여 유부의 교학에 정통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대승경전을 구하려고 편력하고 대승의 교리를 체득하여 이것을 체계화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남인도로 돌아가 사타바하나 왕조의 보호를 받았다. 그에게는 다수의 저작이 있으나 주된 것으로는 <대지도론>, <중론>, <십이문론>, <십주비바사론> 등이 있다. <대지도론>은 한역된 것만 현존하고 있으며, <대품반야경>에 대한 주석서이다. 본론에서는 각종 대승경전이나 부파의 학설을 인용하여 축어적(逐語的)으로 교의, 전설, 교단 등에 대한 해설을 총망라하고 있다.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진 뒤 북인도 및 중인도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었으나 찬드라굽타가 굽타 왕조를 창설하여 파탈리풋트라에 도읍을 정하고 그의 아들 사마트라굽타가 남북인도에 지배권을 확대하여 수백 년 만에 마가다의 왕통을 계승하는 통일국가가 성립되었다. 왕조는 바라문교를 부흥시켜 바라문의 사용어인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정하였기 때문에 문화는 융성하였다. 불교도 왕조의 관대한 종교정책에 의해 5세기 초에는 나란다에 대승원이 건립되었다. 바라문교의 학파인 육파(六派)철학에 대항하여 불교의 교학도 현저하게 발전하였고 많은 수의 학장을 배출하였으나 교학의 전문화는 민중과의 격차를 크게 하였다. 그리하여 부파교학의 전문화와 비구생활의 승원화를 비난하여 일어난 대승이 이 시대에 교학중심으로 된 것은 신앙을 지주로 하고 있는 민중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는 인도에 있어서 불교 쇠퇴의 징조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아시아에 성립하였던 두 개의 커다란 문화권은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이다. 이 두 개의 문화권은 지리적으로는 같은 아시아 대륙에 존재하며 땅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들 문화권은 기후나 풍토 등의 자연적 조건은 물론 인종, 언어, 풍속, 관습, 사회구조 등의 차이도 뚜렷하다. 기원전 1500년경에 인도에서는 베다 문명이 꽃을 피웠으나 중국에서는 은주(殷周) 문명이 발달하였다.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붓다가 활약하였던 기원전 5, 4세기경에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였고 공자나 노자를 비롯한 많은 사상사들이 출현하였던 시대였다.

이 두 개의 단절되었던 문화가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말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수 있는 동서교통로가 열린 무렵부터다. 서쪽 로마제국에서부터 동쪽 장안(長安)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개설되고 동서교통에 의한 통상교역이 확대되었다. 서북인도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방으로 전파된 불교는 실크로드의 상인들과 함께 점차 중국에 전파되었다. 불교는 서북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파한 것만이 아니고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 반도를 우회하여 남부해로를 통하여 베트남을 경유하여 중국남부에도 전해졌다. 인도 승려와 서역 승려가 중국에 건너오기도 하였으나 중국 승려인 법현, 현장, 의정 등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전을 가져오기 위해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긴 세월에 걸쳐 서역을 순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빈번한 문화교류에 의하여 불교는 이질적인 문화권인 중국에 점차 전파되었던 것이다.

 

 

후한(後漢)의 불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연대에 대해서는 중국문헌에 몇 가지 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주대(周代)에 이미 중국인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고도 하고, 그 보다 뒤인 후한대의 명제(明帝)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수백 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에 전해져서 중앙아시아와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어느새 불교가 들어와서 그 정확한 연대를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는 민족 신앙인 도교와 불교의 항쟁이 계속되었고 불교교단이 성립하여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됨과 동시에 그에 자극되어 도교 교단도 형성되어 이 두 세력 간에 우열이 논해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불교는 전래가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내세워서 그 권위를 유지하려고 불교전래의 역사를 아주 오랜 시대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불교전래에 대한 여러 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구법설(求法說)이다.

 

 

위(魏), 진(晋)의 불교

위진(魏晋)의 360 여 년간은 진(秦)과 한(漢)에 걸친 400여년의 통일시대를 이어 다시 중국이 분열한 시대였다. 안세고와 지루가참이 중국에 건너왔던 후한의 환제와 영제시대는 후한의 정치적 통제력이 약화하여 붕과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후한 말이 되어 간신이 발호하여 명사나 학자가 탄압을 받아 한나라 왕실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군웅이 봉기하고 종교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침내 한(漢) 제국은 무너져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분립시대가 되었다가 다시 진(晋)에 의해 통일되었다.

삼국 중에서 위(魏)는 화북을 점유하고 그 세력도 강하였으며, 오(吳)도 강남의 옥토에 근거하였으나 촉(蜀)은 사천의 분지에 위치하고 영역도 작았다. 이 촉(蜀)에 들어간 불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촉(蜀)의 불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촉(蜀)을 제외하면 삼국시대의 불교의 중심지는 북에서는 낙양(洛陽)이었고, 남에서는 건업(建業)이었다. 위(魏), 오(吳), 촉(蜀) 삼국의 정립시대에 강북에서 활약한 번역가는 중인도의 담가가라(曇柯迦羅) 등이며, 강남에서는 오(吳)의 지겸(支謙), 강승회(康僧會) 등이 주목된다.

 

 

남북조(南北朝)의 불교

남북조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남조와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북조를 가리키며, 북위의 태무제가 화북의 여러 나라를 통일하고 나서 수(隨)가 남북을 통일하기까지 150년간을 말한다. 동진시대와 마찬가지로 화북은 호족 지배하에 있었으며 강남지방은 한(漢)족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왕조의 변천은 어지럽게 행해졌지만 불교는 동진시대를 계승하여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던 시대이다. 엄청나게 번역되었던 한역불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불교의 여러 학파가 성립되었던 것도 남북조 시대이다. 불교교단의 사회적 세력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북조에서는 북위 태무제의 폐불과 북주 무제의 폐불이 행해져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교단의 탄압이 행하여 졌다. 또한 종교교단으로 성립된 도교와의 대립항쟁이 있었던 것도 남북조 종교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위의 낙양이나 남조 건강(建康)에서 이루어진 불교사원의 아름답고 우아한 건축, 미술이나 운강, 용문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교문화의 발달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수(隨)의 불교

수(隨)의 고조 문제(文帝)는 북주 무제의 폐불 후 대상 3년(581) 정제의 선양을 이어받아 즉위하고 개황이라 개원하였으며 대상 9년(589)에는 남조인 진(陳)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수(隨) 대의 불교부흥과 눈부신 발전은 무엇보다도 문제의 불교 부흥 사업을 손꼽을 수 있다. 통일국가를 이룩한 문제(文帝)는 일단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교의 덕치주의를 이상으로 하여 예교(禮敎)의 실천을 통해서 강력한 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한족과 호족의 대립이 계속되었던 당시로서는 유교의 덕치주의에만 의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文帝)는 어렸을 때 귀여워해주던 반야사 지선(智仙)의 영향을 받아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만년에는 불교신앙에 대한 열의가 높아짐에 따라 유교에는 냉담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인수 원년(601) 6월에 전국의 공립학교를 폐지하는 조칙을 반포하고 주요한 주(州) 111개소에 불사리(佛舍利)를 반송하고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당(唐)의 불교

당(唐)대에는 통일국가가 건설되고 국가의식이 강화되어 중화사상이 고취되었다. 따라서 왕법 아래 불교가 종속해야 한다는 원칙이 정해져 승려의 범죄에 관한 규정이 국법 중에 명기되고, 승단의 통제를 담당하는 관직도 꼭 승려로 임명하지 않고 일반 관리로 하여금 담당하도록 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당(唐)대 불교가 국가에 종속하게 된 하나의 증거로 사문예경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을 들 수 있다. 당(唐) 태종은 정관 5년(631) 칙서에 의해 천하의 승려에게 부모를 존경토록 하였으나 정관 7년에는 이것이 정지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고종은 용삭 2년(662) 4월에 승도는 군친(君親)을 예배해야 한다는 칙서를 내렸는데, 도선, 위수, 언종 등이 이에 반대하여 그 불가한 이유를 상소했다. 이에 대한 백관의 심의도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결말을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군주에는 불배, 양친은 예경하라는 칙서로 결정을 보았다. 그 후 현종은 개원 2년(714)에 다시 부모를 예배하라고 칙서를 내렸다.

당의 고조는 건국 초인 무덕 원년(618)에 승과 도사 각각 69명을 태극전에 받아들여 무차대회를 열었고 7일간의 행도를 명하여 건국의 희생자의 명복을 빌었다. 태종도 국위를 떨친 전몰장병을 위해서 각지의 전쟁터에 일곱 개의 절을 세우고 군신에게 칙하여 각 사(寺)에 비문을 세우게 하고 무훈을 현창하였다. 그리고 그 해 5월, 선제 고조의 기신(忌辰)에는 장안의 장경사에서 제를 행하고 이것을 국기(國忌)의 법회로 정하였다. 그 해 7월에는 경성과 천하 제주(諸州)의 승도에게 칙서를 내려 국민의 기복과 백곡의 성숙을 위해서 7일 동안 전경, 행도를 명하였으며 이것을 매년 정월과 7월의 연중행사로 하도록 하였다. 다음에 정월에는 장안의 사문에게 칙(勅)하여 매월 27일에 <인왕경>을 강독하고 행도하여 당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자복(資福)을 빌도록 하였다.

 

 

오대(五代)의 불교

당(唐)의 선무절도사 주전충이 애제(哀帝)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나라를 빼앗고 후량을 세운 이후부터 후주의 세종사후 조광윤이 공제(恭帝)의 뜻을 받들어 송을 건국하기까지의 50여년이라는 단기간에 중앙정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로 이어지고 지방에는 오(吳), 남당(南唐), 전촉(前蜀), 후촉(後蜀), 남한(南漢), 초(楚), 오월(吳越), 민, 남평(南平), 북한(北漢)의 10국이 흥망 하였다. 안록산의 반란 이후 귀족사회는 붕괴되고 서민사회의 대두가 특색으로 나타나는데 불교에 있어서도 종래의 장안, 낙양 중심에서 지방으로 분산되었다. 특히 무제의 폐불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학문불교는 퇴색되고 실천적 성향의 선종이 지방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대의 왕조도 수시로 변화하여 낙양, 개봉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지방에는 계속되는 사회불안 때문에 불교계 역시 큰 발전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항쟁의 중심에서 벗어난 10국에서는 장기간의 안정된 정권이 존재하여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발전하고 불교도 군주의 호불(護佛)정책에 의해 발전하였다. 특히 오월, 남당, 민의 불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송(宋)의 불교

귀덕군의 절도사인 조광윤은 후주의 선양을 이어 제위에 오른 뒤 송(宋)을 건국하여 수도를 개봉에 정했다. 후주의 현덕 2년(955) 세종의 파불 사건을 이어받은 송 태조는 먼저 불교의 부흥정책을 취하여 민심의 파악에 힘썼다. 건릉 원년(960) 6월에는 천하의 제사원에 칙서를 내려서 후주가 발한 무액사원의 폐훼에 대한 정지를 명하여 폐해야 할 사원으로서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사원의 존속을 허락하고 이미 폐한 사원의 불상을 옮기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조사나 도승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었으며 세종의 숙청정책을 답습하면서도 극단적인 면만을 시정하였다. 태조는 건국의 해에 황제 탄생일인 2월 16일을 장준절이라 정하고 수도인 개봉의 상국사로 백관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 후로 태조는 종종 상국사로 행차하여 기우의 건재를 올렸고 개보 2년(969)의 장준절에는 천하의 사문에게 경율론의 교의 10조를 전시(殿試)하였으며 이에 장원한 자에게는 자의(紫衣)를 하사하였다. 시경도승(試經度僧)과 전시(殿試)에 의한 교단의 숙청 및 승니의 향상을 기하였다. 태조의 칙서에 의해서 우가응제사문인 문승은 <대장경수함색은> 660권을 편수하였으며, 또 개보 4년(971) 고품의 장종신에게 촉의 익주로 가서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불교 보호정책은 태종에 이르러 송조(宋朝)의 기초 확립과 함께 성과를 보게 되었다.

 

 

요(遼), 금(金)의 불교

요(遼)를 세운 거란족은 남북조 무렵부터 시라무렌유역에 근거지를 삼고 있던 유목민족으로서 당(唐)대에는 8부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당 말에 야율아보기가 나와서 거란의 부족을 결합하여 916년에는 천황왕이라 칭하고 동부 몽고의 임황에 수도를 정했다. 여기에 거란의 제국 요(遼) 왕조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약 200년간을 존속하였다. 요(遼)의 영토는 만주, 몽고 및 하북, 산서의 일부에까지 퍼져 있으며 그 영역 내에는 발해인 이나 한(漢)인들이 많았다. 요(遼)는 국초 이래 불교를 숭상하고 불교가 국교였다. 912년에 벌써 임황에 천웅사가 건립되었고 제2대 태종도 안국사를 건립하였다. 태종은 관음보살을 신앙하여 황태후의 쾌유를 위해서 반승(飯僧)을 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황실의 귀의를 받은 불교는 급속히 발전하게 되어 국력이 강성했던 성종시대 부터 흥종, 도종 무렵에 걸쳐서 그 전성기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遼)조의 숭불은 순수한 신앙심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거란족의 고유 신앙은 샤머니즘이었으며 이는 씨족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거란이 건국하여 전제 군주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씨족제를 타파하고 초씨족적인 종교가 필요하게 되었고 여기에 알맞은 것이 불교였다. 거란대장경 조조도 국가적 사업으로 행해졌던 것으로서 홍종조에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고 도종의 청녕 5년(1059)에 579질, 5048권의 조조가 끝나게 되었다. 그 뒤로는 얻어진 대로 진적비소(珍籍秘書)의 보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대장경이라고는 하지만 거기에 사용된 문자는 한자였으며 거란문자는 아니었다. 거란대장경은 그 후로 수차례 걸쳐 고려에 사여되어 고려대장경에 영향을 끼쳤다. 요대에는 불교교리의 연구로 성행하여 학승도 많았고 현존하는 저작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의 불교사상은 화엄이 중심이었는데, 도종(道宗) 무렵부터는 밀교가 성행했고 율도 존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었으며 융합통일의 경향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밀교가 유행한 것은 거란민족의 고유 신앙인 샤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元)의 불교

원(元)을 일으킨 몽고족은 요(遼), 금의 시대에는 외몽고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2세기말에 테무친이 몽고의 부족을 통일하여 내외몽고에 세력을 키워갔으며 1206년에는 대한(大汗)의 위에 올라 칭기즈 칸이라는 존호를 받았으니 그가 바로 원(元)의 태조이다. 태조는 먼저 서하(西夏)를 멸망시키고 금을 압박했으나 봉선(鋒先)을 서쪽으로 돌려 대서정(大西征)을 시작하였다. 이 서정(西征)은 태종시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몽고군은 유럽에까지 진출하였다. 서하와 금도 몽고군에게 항복하였으며 한반도까지도 그 세력 하에 들어갔다. 세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원조(元祖)가 출현했던 것이다. 원(元)은 칭기즈 칸이 즉위하고부터 멸망할 때까지 162년간, 국호를 원(元)으로 바꾼 세조의 즉위부터는 11대 97년간 계속되었다. 원조(元祖)는 그 지배 지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대해 평등하고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적어도 반몽고적 색채를 띠지 않는 한 종교에 대해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明), 청(淸)의 불교

원말(元末)의 천재기아에 의한 사회불안 속에 미륵교비(彌勒敎匪) 한산동과 한림아 부자의 반란이 확대되어 드디어 송국(宋國)이라고 칭하였다. 곽자홍의 부하인 주원장은 원래 황각사의 승려였는데 환속하여 병졸이 되었다가 부장이 되어 군웅을 물리치고 금릉에 도읍하여 명(明)이라 호하고 제위에 올라 홍무(洪武)라고 개원하였다. 명조(明祖)는 사원생활을 체험한 제왕의 독재하에 시정 또한 보수적이었으며 반란의 기반이 되기 쉬운 불교교단을 단속하면서 보호하였다. 원의 선정원의 제도를 본떠서 불교통제기관으로서의 선세원(善世院)이 금릉의 천계사에 설치되었고 통령(統領), 부통령(副統領), 찬령(贊領), 기화(紀化) 등의 승관제가 정해진 것은 홍무 원년(1368)의 일이다. 홍무 15년(1382)에는 선세원이 승사록으로 바뀌었고, 선세(善世), 천교(闡敎), 강경(講經), 각의(覺義)의 승관을 두게 되었으며 지방의 부주현에는 각기 승강사(僧綱司), 승정사(僧正司), 승회사(僧會司)가 있어서 중앙집권적인 불교통제기관이 확립되었다. 또 홍무 6년(1373)에는 계율을 잘 지키고 경전에 능통한 자만이 도첩을 청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는 40세를 넘어야만 출가하여 승니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제정되기도 했다.

송 이후 사원에서의 선(禪), 교(敎), 율(律)의 분류가 명대에서는 선(禪), 강(講), 교(敎)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 분류에 따라서 홍무 15년에 선승은 다갈색인 옷과 홍조 옥색의 가사를, 강승(講僧)은 옥색 옷에 홍조 천홍의 가사를, 교승(敎僧)은 백의와 흑조 천홍의 가사를 착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명 불교를 대표하는 선과 정토에 대해서 염불은 참선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참선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선정일치를 주축으로 하는 각 종파의 호융(互融)은 명대불교의 특색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에 불교 홍포에 힘쓴 주굉, 진가, 덕청, 지욱 등 사대사(四大師)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