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풀이

가람(伽藍)

승가람마(僧伽藍摩) 또는 승가람(僧伽藍)의 약어입니다.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청정한 장소를 말합니다.

나중에는 사원 또는 사원의 건조물의 의미로 되었습니다.

승려가 사는 사원이나 당사, 승원, 부속 건축을 구비한 곳을 총칭하여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 합니다.

 

가부좌(跏趺坐)

가부좌는 결가부좌의 약어인 데, 결가부좌(結跏趺坐)란 앉는 법의 한 가지로서 '가'는 발의 안, '부'는 발의 등을 말하며, 오른쪽 발을 우선 왼쪽 허벅지 위에 얹고 다음에 왼쪽 발을 오른쪽 위에 얹어 앉는 법입니다.

부처님은 반드시 이 앉는 법을 따르기 때문에 여래좌 ?불좌라고도 합니다. 결과부좌에 대해 좌우 중 한쪽 발을 좌우의 한쪽 허벅지 위에 놓는 것을 , 반가좌(半跏坐)라고 합니다.

반가좌는 오른발을 왼발의 밑에 두면, 왼발이 오른발 아래에 감추어 지고, 오른발 바닥만이 위를 향하게 됩니다. 선종에서는 결과부좌를 좌선의 바른 자세로 정하고 있습니다.

 

가피(加被)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위신력(威神力)을 받아서 중생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으로 이익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가호(加護)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감로법(甘露法)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며, 법을 음미하는 맛이 감로와 같다고 하는 뜻에서 중생이 법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감로의 덕에 비유한 것입니다.

 

감로(甘露)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설하시는 것이 감로 입니다. 감로는 단 이슬이란 뜻이며, 오래 전에도 임금이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면 하늘에서 감로가 내린다고도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이 감로인 까닭은 중생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알게 됨으로써 중생의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고 고통의 세상에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로는 도리천에 있는 천주(天酒, 천신들의 음료)이며 아주 좋은 약으로 한 방울만 먹으면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감로는 감로다(甘露茶), 감로수(甘露水)라고도 하지만 부처님 앞에 올리는 찻물이나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상용하는 음료로 이것을 마시면, 불로불사가 된다고 합니다. 그 맛이 꿀같이 달다고 불리는 것에서 감로라 하고, 기분 좋게 하는 맛있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하고 술까지도 말합니다. 하늘에서 내린 단 이슬로 마시면 불사를 얻어 빛이 되고, 신이 된다고 말하지요. 불교에서는 도리천의 단 영액이라 간주되어 고뇌를 싫어하고 장수하며, 죽은 이를 환생 시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맛은 달고, 마시면 죽지 않는다고 일컬어지던 것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유하게 되었습니다. 또는 열반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거나 목이 마를 때 겨우 얻은 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계정혜(戒定慧)

계(戒)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 윤리 도덕적인 규범, 정은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 혜는 수행을 통하여 얻는 지혜. 깨달음의 방법은 이 셋 안에 다 들어온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틀어서 삼학이라고 합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苦는 괴로움, 集은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 곧, 집착, 滅은 괴로움의 소멸, 道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합니다. 이것을 사제라고 합니다.

 

고행(苦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願望을 달성하기 위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도에서 불교 외의 종교행자(외도)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육체를 극도로 혹사 시키는 수행을 말합니다. 즉 육체적 욕망을 없애고, 최고의 정신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준열한 육체적 가책을 말하고, 불교 이외의 종교에서 이용된 수행으로 단식, 호흡제어, 특수한 자학적 행위로 육체를 괴롭히고, 자신이 원하는 소망의 달성과 정신적 자유를 기대했지만, 석존은 오히려 극단적인 고행을 배제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나중에는 보시·자비 등 불도에 맞는 목적을 위한 難行이라고도 합니다.

 

극락(極樂)

극락(極樂)은 수마리(須摩提, sukhavati)의 번역으로 묘락, 안락, 안양(安養), 락방(樂邦)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안락한 이상의 세계이며, 이 정토는 보살이 닦는 인행(因行)의 보(報)로서 이루어진 보토(報土)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서방으로 십만억 불토(佛土)를 지나간 곳에 있다는 아미타불의 정토로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의 이상을 실현한 국토라고 합니다. 아미타불이 지금도 있어 항상 설법하며, 모든 일이 구족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전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입니다. 사람들은 죽어서 극락왕생(極樂往生), 즉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고자 염원하고 선업을 쌓으면 그곳에 태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에는 이 정토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이 나라에 태어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즐거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몸과 같이 32상(相)과 신통을 얻고, 5관(官)의 대상은 모두 미묘하고, 즐겁고, 마음대로 법을 듣고, 부처님에게 공양하면 깨달음이 열린다고 합니다. 단 극락에는 변지(邊地), 의성(疑城), 태궁(胎宮) 등으로 불리는 변두리가 있어서,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혹을 품은 사람이 이곳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관(觀)

진리를 관하는 것.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한 경지로 세계의 존재 그대로를 바르게 조망하는 것. 또는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집중해서 자신의 참나, 즉 본래면목에 놓고 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욕(灌浴)

영혼을 목욕시키는 의식입니다.

관욕을 행하는 곳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도록 병풍으로 둘러치고 밖에는 관욕방이라 써서 불이고 관욕 단에는 남신구, 여신구를 먹으로 써서 병풍에 붙입니다.

관욕수는 두 대야를 준비하여 하나에는 버드나무 발을 걸치고 기왓장 위에 종이옷을 준비하여 위패 주위에 촛불을 밝혀 관욕수에 비치도록 합니다.

관욕의 절차는 법주가 각 진언을 외우면 관욕단의 법사는 각기 거기에 해당하는 인지를 나타내어 그때그때의 동작을 행합니다.

뜰을 지나 법당문을 열고 불단을 향하여 삼보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출욕참성편이 끈나면 법성게를 외우며 도량을 돌아 본래의 영단에 자리하고 제사를 받습니다.

영혼을 위해 명바라(冥鉢羅)를 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

관세음보살의 다른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의 중생계를 관찰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제해 주는 것이 자유자재한 보살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괘불(卦佛)

법당 밖에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은 예배용 불교 그림입니다.

법당 바깥에 있는 당간지주 등에 내걸고 법회나 의식을 베푸는 것을 괘불재(卦佛齋)라고 하며 괘불을 거는 것을 괘불이운이라고 합니다.

 

귀의(歸依)

첫째, 귀명이라고도 합니다.

뛰어난 사람에게 귀순하여 의지하는 것으로 귀의란 절대적으로 훌륭한 것에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다른 말로 절대적으로 믿고 받들어 의지처로 삼는 것입니다.

둘째, 불교에서는 불법의 기본인 불법승의 삼보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특히 부처님(불), 가르침(법), 승단(승)에 의지하는 것 또는 의지할 것을 약속하는 것을 삼귀의라고 합니다.

 

극락(極樂)

극락은 이 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의 불국토를 지나면 저쪽 편에 있는 곳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머물며 항상 설법 하고 계시는 곳으로, 일체의 고통이 없고 자유롭고 안락함이 가득하여 모든 중생이 왕생하기를 소망하는 이상향입니다. <아미타경>에 이 정토의 모습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금강계단(金剛戒壇)

부처님 사리(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授戒儀式) 을 집행하는 장소입니다.

금강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한 번 계를 얻으면 영원히 잃지 않는 것이 마치 금강을 깨뜨릴 수 없는 것에 비유하며, 또한 열반을 성취함에 있어 삼학의 원만한 획득이 가장 중요한데, 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율이 으뜸이라는 뜻에서 흔히 戒檀을 금강계단이라고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상주한다는 상징성과 함께 성역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643년 (선덕여왕 12) 에 신라의 자장(慈藏) 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에서 불경과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와서 통도사 戒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중수하였지만,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중앙의 석종형(石鍾形) 부도와 사방 평면에 2단의 석던은 전통적인 금강계단의 형태를 그대로 전승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개성 불일사(佛日寺)의 계단과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의 계단, 금산사(金山寺)의 방등계단(方等戒壇) 등이 유명한데, 용연사의 것은 임진왜란 때 묘향산으로 옮긴 통도사의 부처님 사리 일부를 분산 봉안 한 것이고, 금산사의 것은 계단 앞에 석등 대신 석탑을 세워 고려시대의 계단 형식을 살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아울러 금강계단의 전면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건 전각을 건립하고, 불상은 봉안하지 않는데 이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금강계단을 일반 불상보다 상위의 귀의처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정사(祇園精舍)

기원정사는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 와 함께 불교교단의 2대 정사입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의 교화기간 중 무려 24회의 우안거를 지내면서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이 기원정사입니다. 오늘날 불교도들이 독송하는 수많은 경전(經典)도 주로 이곳에서 설해진 것이랍니다.

나무(南無)

나무는 귀명(歸命) 귀경(歸京) 신종(信從)등이라 한역합니다.

진심으로 불瑠洶승의 삼보에 귀순하여 믿음을 바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아미타불' 하면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나투다

 나타나다, 현현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부처님께서 정신적인 모습을 나타내실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한상(羅漢像)

나한을 조각 또는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본래 불경에서는 나한을 성문사과(聲聞四果) 의 하나로 놓으며 일체의 번뇌를 끊고 끝없는 지혜를 얻어 세상 사람들의 공양을 받는 성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부처님의 직제자뿐만 아니라 역대 여러 나라의 존경받던 수많은 고승대덕들을 함께 일컫는 말로서 흔히 아라한이라고 부릅니다.

나한상은 바로 그 같은 불제자, 역대조사나 고승대덕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절에 가면 나한상이 출가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다소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은 바로 노비구로서 많은 수련을 쌓았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나한상에는 십대제자상과 십육나한, 오백나한상이 가장 유명한데, 십육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應眞殿) 이라 하고 오백나한을 모신 곳을 오백나한전이라 부릅니다.

나한상은 단독의 석가상이나 혹은 삼존불 좌우에 아난과 가섭이 같이 모셔져 있는 오존불을 중심으로 해서 그 좌우에 각각 배열되는데, 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오른쪽에는 짝수 서열의 나한이 그리고 왼쪽에는 홀수 서열의 나한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현재 전하는 나한상은 조선시대 이후의 것이 가장 많고,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석굴암 십대제자상이 있으며, 고려시대 작품은 서울 승가사의 석굴 나한상 그리고 합천 해인사의 희랑조사상 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나한상으로는 송광사,통도사 등의 십육나한상이 유명합니다.

 

녹야원(鹿野苑)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뒤 처음으로 이 곳에서 다섯 비구들을 상대로 설법하셨습니다.

녹원(鹿苑) 즉 사슴 동산 이라고도 합니다.

 

니르바나

 진리를 깨달아 얻는 마지막 경지입니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삶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합니다. 불교는 이 경지를 이상으로 삼으며, 모든 수행자들도 역시 이 경지를 목표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해탈이라고도 합니다.

다라니 (陀羅尼)

다라니는 신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주문입니다.

진언이 이에 속하는 것으로 일종의 기억술로서 하나의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다른 모든 일까지 연상하고 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무량하고 무변한 이치를 얻어 상실하지 않는 힘을 말합니다. 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라니를 얻어야 하며, 다라니를 얻으면 불법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대중 가운데에 있어도 두려움 없이 불법을 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비의식(茶毘儀式)

불교 장례의식 가운데 특히 화장(火葬) 의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비는 나무와 숯 등으로 화장장을 만들고 거기에 관을 올려 놓은 뒤 거화편을 외우는 등으로 진행됩니다.

 

단청(丹靑)

목조건물에 채색으로 무늬를 그리는 것을 가리키는 건축용어 입니다.

본래는 건축물이나 기물 등의 보존성을 높이고 흠을 가리며 그 건물이 지닌 격을 나타내는 데 의미를 지녔습니다. 불교미술에서는 불교건축물이나 기타 불교미술품에 그리는 장식화의 의미로 국한시켜 봅니다.

즉 불교공예품과 조각 물 등의 의장에 오색의 안료를 칠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나 건물 벽에 그리는 장식화와 탱화까지 모두 단청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의 본존인 대방광(大方廣)의 이치를 증득한 부처님을 대방광불이라고 합니다.

 

대비(大悲)

1.커다란 동정이라는 뜻인데, 비는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을 뜻합니다.

타인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 '비'인데, 이에 상대되는 '자비'는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비는 많은 사람들의 괴로움을 구제하려고 하는 불留말裏, 자비심 또는 자애가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2.부처님이 이미 깨달음을 이루었으나 그의 모든 공덕은 오로지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즉 부모가 그 아이를 연민하는 것처럼 일체중생에 한없는 자비심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건져 삼계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대세지(大勢至)

대세지는 아미타불의 바른편 보처입니다.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 지혜문이 있는 데, 그 중에서 관세음은 자비문을 표하고, 대세지는 지혜문을 표합니다. 이 보살의 지혜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3도(途)를 여의고 위없는 힘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고 합니다. 또 발을 디디면 삼천 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합니다.

형상은 정수리에 보배병을 얹고 아미타불의 바른쪽에 있으며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아 갈 때에는 합장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불교 선종 계통의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本尊佛)로 모시는 본당입니다.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큰 힘이 있어서 사마(四魔)를 항복시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님의 덕호(德號)에서 유래되었답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대자대비는 부처님의 크고 한없는 자비를 말합니다.

 

대장경(大藏經)

경률론(經律論) 의 삼장이나 여러 고승의 저서 등을 모아서 만든 불교성전입니다.

달리 '일체경(一切經)' <장경> <대장경> <대장> 이라고도 합니다.

범어 원전의 대장경은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지만 팔리어의 원전과, 주로 범어로부터 역출(譯出)한 한역, 서장역, 다시 서장역으로 부터 중역한 몽고역, 만주역 등의 대장경은 대체로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한역 경전을 번역한 한글대장경을 번역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또 대장경의 일부를 영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로 번역한 대장경 등이 있습니다.

 

대행(大行)

첫째, 보살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영원에 걸쳐 여러 선행을 행하고 공덕을 쌓는 일로 대승 의 실천을 말합니다.

둘째, 천태종에서는 사종삼매(四種三昧)를 말하며,

셋째, 진종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의 이름을 말하고, 또 이를 제창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량(道場)

도량이란 도를 닦는 장소이며, 도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문으로 도(道)와 장(場)자를 쓰지만 읽는 것은 도량이라고 읽습니다. 도는 불도(佛道)를 말하고, 최초의 불도의 장소는 부처님이 성도한 곳입니다. 그래서 불교 초기의 도량은 부처님이 가시는 곳과 같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절을 도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도량의 뜻은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화엄경>에서는 도량을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일념 정심(一念淨心)하면 그것이 도량이다. 일념(一念)이란 우리 생각의 최소 단위를 말합니다. 찰나의 생각이 일념으로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의 마음이 찰나의 마음입니다. 찰나 찰나의 마음이 아름다우면 그곳이 도가 있는 곳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르게 깨닫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유마경>에서는 도량을 정직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지성으로 참선하고, 정근하고, 염불하는 마음이 직심(정직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유마경>에서는 "행(行)을 시작함도 도량이다. 보리심도 도량이다. 보시가 도량이다. 계를 지키는 것이 도량이다. 인욕이 도량이다. 정진이 도량이다. 선정이 도량이다. 지혜가 도량이다. 대자(大慈)가 도량이다. 대비(大悲)가 도량이다. 대희(大喜)가 도량이다. 대사(大捨)가 도량이다…….일체의 법이 도량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량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고, 넓은 도량이란 깨달음이 넓고 깊은 것입니다.

 

도반(道伴)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으로서, 도(道)로서 사귄 친구란 뜻입니다.

 

도솔천(兜率天)

도솔천의 한문은 두솔천으로 쓰고, 읽기는 도솔천이라고 읽는 데에 주의해야 합니다. 도솔천은 칠보로 장식된 궁전이 즐비한 정토세계(淨土世界)입니다.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습니다. 내원에는 미륵부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부터를 정토(淨土)라고 합니다.

도솔천욕계의 육천(六天) 중 제4천. 이 하늘의 내원(內院)은 장래 부처가 될 보살의 주거지로 일컬어지며, 석존도 예전에 여기에서 수행하고, 현재 미륵보살도 이곳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의 천인(天人)의 수명은 사천년, 그 하루 밤낮이 인간계의 사백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화락천(化樂天)은 도솔천의 위에 있습니다. 대상물을 마음대로 변화시켜 즐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화는 변화의 준말이고 변화의 대상은 사람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즐기는 모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있어라."하면 있고 "바뀌어라."하면 바뀝니다.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이르다의 의미로 완성하는 것을 말하고 바라밀과 같은 의미입니다.

 

동안거(冬安居)

안거에는 여름의 안거(安居)와, 겨울(10월 16일부터 1월15일까지) 안거(安居)가 있습니다.

겨울 동안에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서 도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중국, 한국, 일본의 선사(禪寺)에서 여름 안거 이외에,10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15일까지 스님네의 외출을 금하고 좌선하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인도 등지에서는 여름 안거만 지낸다고 합니다.

 

동체대비(同體大悲)

불留말裏, 대자비(大慈悲). 중생과 자기는 동일체로 본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 둘째, 모든 부처님의 자비는, 말하자면 사람들을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미타불의 자비와 본질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득도(得度)

1.미혹의 세계에서 피안으로 건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곧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2.깨달음을 얻는 것, 즉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석존(釋尊)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석존이 득도하였다는 뜻입니다.

룸비니(藍毘尼)

석존이 태어난 곳으로 중인도 카탈라성의 동쪽에 있던 꽃동상. 지금의 연합주 지방 코라쓰크풀주의 북쪽에 해당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위대한 지혜의 완성을 말합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地藏殿이라고 하며, 幽冥 界의 심판관인 십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십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합니다. 명부전은 사찰 내의 불전들 중에서 그 격이 한 단계 떨어지므로 건물의 크기나 양식도 주불전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전각 내의 배치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즉 대웅전 등에는 중앙의 불단 위에 불상을 봉안하나 명부전에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를 , 오른쪽에는 무독귀왕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 流오迷站판관 2인柳而 ?2인戮掠?2인을 ? 자형으로 배치하게 됩니다.

 

목어(木魚)

목어는 나무를 깍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안쪽의 양 벽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법구입니다. 물 속의 중생을 제도하고 게으른 수행자를 경책하는 뜻이 담긴 목어는 조석예불 염불 독경 때 쓰는 사물의 하나로서, 대를 알리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 중국의 선원(禪院)에서는 아침 죽 때와 낮의 밥 때에 쓰던 것입니다. 어고(魚鼓), 목어고(木魚鼓), 어판(魚板) 또는 '나'라고도 하며, 사찰에서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두드리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 권하 ,<법기장(法器章)> 목어조(木魚條)에 보면 물고기는 밤에도 눈을 뜨고 있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잠을 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개어 있어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에서라고 밝히고 있고, 또 다른 의미는 물 속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뜻이 담긴 목어가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서는 <증수교원청규(增修敎苑淸規)) 권하 <법기문(法器門)) 목어조(木魚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목탁(木鐸)

둥글게 만든 목어(木魚)를 우리나라에서는 목탁이라 합니다.

독경이나 염불할 때 두들겨서 박자를 맞추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사용합니다. 식사 때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도 칩니다. 아침, 저녁에 예불할 때 , 절을 할 때를 알리기 위한 신호로 쓰기도 합니다. 목탁을 길게 똑똑똑또또또독?????? 하고 칠 때는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합니다. 짧게 칠 때는 합장한 채 허리만을 굽혀 반절을 합니다.

목탁을 자세히 보면 물고기를 닮았습니다. 손잡이 쪽은 꼬리고 가운데 갈라진 부분은 고기의 입입니다. 눈은 양쪽으로 나있습니다. 고기의 속은 모두 비워서 두들기면 입부분과 눈부분이 두드린 소리를 한 번 더 공명시키고 다듬어서 맑고 둥글게 만듭니다. 악기로 치면 훌륭한 타악기입니다. 목탁의 재료로는 살구나무가 좋다고 합니다. 목탁은 목어(木魚)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어는 나무로 깍은 물고기 모양입니다. 지금도 절에는 목어를 매달아 사용합니다. 목어가 간소화된 것이 목탁이라고 보면 대과가 없을 것입니다.

목탁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고기가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있음을 본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에게는 잠이 큰 마군입니다. 그래서 잠을 쫓기 위한 도구로 목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우리가 <법화경>이라고 하는 것은 이의 약칭입니다. 이 경은 모든 불교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들에 의해서 수지(受持) 애호된 대승경전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

팔열지옥(八熱地獄)의 제8로서 또 무구(無救)라고도 한역합니다. 괴로움을 받는 일이 사이도 없이 끊임없기 때문에 무간으로 부릅니다. 격렬한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세계 극고의 지옥 중에서 7중(重)의 철성(鐵城)이 있는데 동(銅)이 끓어 죄인을 죽인다고 합니다. 오역죄(五逆罪) 외에 대승을 비방한 자가 떨어집니다.

 

무량공덕(無量功德 )

헤아려 알 수 없는 부처님의 공덕입니다.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대개 석가모니 부처님 왼쪽에 안치되지만 후대에는 비로자나불의 왼쪽 협시보살로 주로 봉안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문수보살상이 특히 많았으니, 석굴암 문수보살상이 대표적입니다.

후대에서는 문수전에 단독으로 봉안되기도 했으며 문수보살상만을 믿는 사찰인 문수원(文殊院)도 있었습니다. 문수보살은 <화엄경> <반야경> 등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미륵보살(彌勒菩薩)

인도의 바라나시곡의 바라문 집 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성불을 하지 않고 있는 네 가지 일(四事) 즉 국토를 정회하고 수호하며, 중생을 정화하고, 중생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大乘的) 자비사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법당의 이름이다. 이 미륵전은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장한다고도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意譯)인 자씨를 취하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릅니다.

바라밀

 바라밀 도피안(度彼岸)으로 한역되며, 즉 피안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수행으로, 바라밀로서는 시(施) 계(戒) 인(忍) 진(進) 정(定) 혜(慧)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이것에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志)를 더하여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세우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란 

 (1) 보시(布施) . 사람에게 재물을 주고, 진리를 가르치고, 안심을 주는 것.

 (2) 지계. 계율(戒律)을 지키는 것.

 (3) 인욕 박해와 곤고를 참는 것

 (4) 정진. 심신을 힘쓰며, 다른 오바라밀을 수행하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

 (5) 선정. 마음을 집중하고 안정시키는 것.

 (6) 지혜. 미혹을 여의고, 존재의 궁극에 있는 실상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제6의 반야에 방편원력지의 4가지를 더하여 십바라밀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야(般若)

법의 이치에 맞는 최상의 지혜입니다. 반야를 얻은 이는 부처님이므로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스승, 도는 어머니라고 일컬으며, 또 이는 법의 여실한 이체에 계합한 절대 평등의 무념무상이며, 중생을 교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입니다.

 

발우(鉢盂)

부처님 때부터 공양하던 스님들의 밥그릇을 발우라고 합니다. 발우란 발(鉢)과 우(盂)의 합성어입니다. 발은 산스크리트어의 파트라(Partra)에서 유래된 것으로 먹을 양을 책정해 준다는 의미로 응량기(應量器)라고 번역합니다. 우(盂)는 중국어로 그릇을 나타낸 한자입니다. 바루라고도 합니다. 바루는 범어와 중국어의 복합어로서 우리말로는 흔히 바리때라고도 합니다. 바루는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1개뿐이었으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4합이 되었다.

스님들이 바루를 가지고 밥을 비는 것을 탁발(托鉢)이라고 합니다. 스님들의 식사량도 바리때 한 그릇으로 한정되어 있고, 지금도 남방불교계통에서는 걸식할 때 하나의 바루를 사용합니다. 사찰에서는 식사에 대한 고마움과 공덕을 의례화하여 바루공양을 합니다. 바루 공양은 단순한 식사법이 아니라 수행의 한 과정이므로 많은 대중이 모여 공동생활을 할 때는 필수적입니다. 바루공양을 할 때는 예배 ?감사 ?반성 ?자비의 뜻이 담긴 <소심경>을 암송하면서 절차에 따라 식사를 한다. 따라서 규범과 법식에 따르는 바루 공양은 평등, 절약, 단결과 화합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방생(放生)

산야지소(山野池沼)에 물고기와 새를 놓아 주는 것입니다. 자비행(慈悲行)의 하나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번뇌(煩惱)

나쁜 마음의 작용 입니다.

번요뇌란(煩擾惱亂)의 뜻입니다. 고민걱정이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거나 성기시게 하는 작용입니다. 근원적인 번뇌에는 3독이 있는데 3독(三毒)이란, 탐(貪), 진(瞋), 치(癡) 라는 세 가지의 마음의 독을 말하는데 즉, 탐내는 마음 ,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말합니다. 이 번뇌를 모두 녹여야만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범어 klesa의 번역입니다.

길례사(吉隷捨)로 음역하고 혹(惑)이라고도 합니다.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거나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등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입니다. 성질은 악 및 유복무기(有覆無記)입니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을 짓게 되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세계를 헤매게 됩니다. 이것을 혹(惑), 업(業), 고(苦)의 삼도라고 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번뇌를 녹여서 열반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번뇌는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수면, 혹, 염, 루, 결사, 결, 박, 전, 액, 폭류, 취, 개, 궤, 사, 구, 주올, 소해,전(箭), 조림(稠林; 번뇌가 치성한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 진로(塵勞), 진구(塵垢), 객진, 쟁근(諍根; 말다툼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또한 번뇌의 본체를 정사(正使;혹 使라고도 합니다)라 하며, 본체가 소멸되고 남아 있는 습관의 기운을 습기(習氣)라고 합니다. 모든 번뇌는 인력(因力; 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는 것)? 경계력(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 가행력(加行力; 대상에 대해 비리(非理)와 작의(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 일어난다고 합니다. 혹은 경계력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비담종이나 유식에선 번뇌를 근본번뇌와 지말번뇌(枝末煩惱)로 구분합니다. 근본번뇌란 번뇌의 체(體)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며 본혹, 근본혹이라 하거나 수면(隨眠)이라고 합니다. 지말번뇌(枝末煩惱)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서 수혹, 지말혹, 수번뇌라고 합니다. 다만 수번뇌(隨煩惱)는 '심왕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의미로 이해하고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비담에선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 즉 사제(四諦)에 미혹한 사상상의 지적인 번뇌를 미리혹(迷理惑)이라 하고, 구체적인 개개의 현상에 미혹한 인간성의 정의적인 번뇌를 미사혹이라고 합니다. 유식에선 아집 때문에 중생을 미혹의 세계에 유전시켜 열반의 길을 방해하는 혹을 번뇌장이라 하고, 법집 때문에 진리의 체득을 방해하는 혹을 소지장이라 구분하고 있습니다.

 

부적(符籍)

부적은 원래 종이 위에 글씨나 그림이나 기호 등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주술적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즉 부적을 지닌 이에게 악귀가 붙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적은 복을 가져다준다고 까지 믿게 되었습니다.

부적의 기원은 인류가 바위나 동굴에 주술적인 형상을 그리던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미 발견된 우리나라의 암각화에는 주술적인 목적을 지닌 것으로 추축되는 것들이 더러 나타나고 있습니다.

 

백중

 예로부터 음력 7월 15일을 백종(白種),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 불렀습니다. 이 무렵에는 과일과 소채(蔬菜)가 많이 나옵니다. 따라서 백중은 백 가지 곡식의 씨앗(種子)을 갖추어 놓았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날 목련(目蓮)이 어머니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7월15일에 오미백과(五味百果)를 공양했다는 <목련경>의 기록에 따라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열어 공양을 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 우란분회는 신라나 고려 때에는 일반인들까지 참여한 큰 행사였으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민간에서는 사라지고 사찰에서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백팔번뇌(百八煩惱)

중생의 번뇌에는 백팔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6 근(根) 6진(塵)을 대할 때 저마다 호(好),오(惡),평등(平等)의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서 18번뇌를 일으키고, 또 고(苦), 낙(樂), 사(捨) 의 3수(受)가 있어 18번뇌를 내니, 모두 합하여 36종. 또 이를 3세(世)에 배(配)하여 108번뇌가 된다고 합니다.

 

범천(梵天)

범천(梵天)이란 인도사상에서 만유의 근원 브라흐만 (산스크리트어로는 brahman 梵)을 신격화한 것으로, 불교에 들어와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을 이릅니다. 여기에는 범중천(梵衆天) (산스크리트어로는brahma-kayika) 범보천(梵補天) (산스크리트어로는 Brahma-purohita) 대범천(大梵天) (산스크리트어로는 Maha-brahman)의 삼천(三天)이 있고, 그 총칭입니다. 또 보통으로는 대범천(大梵天)을 가리킵니다. 제석천(帝釋天)과 나란히 호법신(護法神)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라문교에서 매우 숭상되던 신으로 불교화 되어서는 제석천과 함께 중요한 신중으로 여겨졌습니다.

욕계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청정하게 부처님의 정법을

 실천합니다. 손에 불자(拂子)를 든 모습이며 부처님의 설법 때마다 빠짐없이 듣는다고 합니다. 범천(梵天)이라고 할 때 범(梵)은 정(淨)과 통합니다. 가장 깨끗한 세계로서의 하늘나라가 범천입니다. 인간으로서 범천에 오르는 것이 최대의 복이라고 합니다. 이상은 인도 사람들이 꿈꾸었던 복의 세계입니다.

 

법륜(法輪)

부처님의 가르침이 퍼져 나가는 것을 바퀴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의 바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리(菩提)

부처님의 정각의 지혜를 뜻합니다.

 

보시(布施)

보시란 베풀어 준다는 뜻입니다. 재물을 베풀고 진리의 가르침을 풀고 두려웁을 덜어 주는 힘과 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는 재물이나 깨달음이나 혹은 힘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만 , 베풀어 준다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매 진리와 막힘없는 상태가 이룩됨으로 베푸는 자도 도리어 진리에 다가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오직 지혜와 자비의 표현으로서 자연스런 인격의 발로여야 합니다. 보시를 할 때는 아끼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하며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서 진리의 문은 조건 없이 열리며 공덕의 물결 또한 조건 없이 한없이 흘러드는 것입니다.

 

보왕삼매(寶王三昧)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염불은 삼매 가운데서 지극히 보배로우므로 보왕삼매(寶王三昧)라고 합니다.

 

불이문(不二門)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서 있습니다. 불이문은 곧 해탈문(解脫門) 입니다. 불이는 둘이 아닌 경지입니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요, 생사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선과 불선(不善), 색(色)과 공(空)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그 근거는 법계의 실상이 여여평등 (法界實相 如如平等) 하다는 데 있습니다.

 

비로자나불 

 범어로는 바이로차나(Vairocana)이며 비로자나불이라고 음역하고 최고현광안장, 변조왕여래, 광명변조, 변일체처, 대일변조 등으로 의역합니다.

비로자나불을 변일체처, 광명변조, 변조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 부처님의 신광 또는 지광이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법계에 두루 원명함을 의미합니다.

사경(寫經)

사경이란 경문(經文) 즉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필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부처님 당시부터 이러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교설에 대한 경전의 결점은 먼저 구송(口誦)으로 되었고, 이렇게 3백여 년 간 내려오다가 대승의 선구경전인 <반야경> 계통의 경전이 문자화되면서 비로소 사경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전이 문자화됨에 따라 많은 대승경전에서는 이것을 전파하기 위하여 경문을 필사하는 것에 특히 큰 뜻을 갖게 되었으며, 사령의 공덕을 아주 높이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사자후(獅子吼)

부처님의 설법. 부처님의 위대함을 사자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천왕(四天王)

사천왕은 본래 세상을 수호하는 수호신인데 불교화 되면서 사방(四方)과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었습니다.

불전이나 탑의 사방을 수호하는 신장으로 많이 조성되었습니다. 방위별로는 동방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 으로 배치됩니다.

 <금광명경>은 각 품마다 사천왕의 보호와 하늘 신장들이 이 경을 옹호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하늘 신장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으로도 퍼져나가는 계기가 됩니다. <금광명경>의 '참회품'과 '찬탄품'에서는 참회를 통한 죄의 소멸법을 차근히 가르치고 있고, '사천왕호국품'에서는 이 경을 수지 독송하면 사천왕이 보호해주며 모든 공포를 없애주고 침략자들을 물리쳐주며,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한 것을 덜어주며, 모든 질병을 낫게 해준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사찰 입구에 모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용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광목천왕은 용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서방(서구 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입니다.

다문천왕은 탑 또는 탑과 창을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을 수호하고 재물과 복덕의 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입니다.

증장천왕는 칼을 잡고 있으며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사람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많게 해주는 천왕입니다.

지국천왕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입니다.

 

산신(山神)

산신은 산군(山君), 산령(山靈),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모두 산을 수호하는 신령들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 민속에서는 산악을 신성한 거승으로 여기고 거기에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치성을 드리는 행위로부터 산신에 대한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산신신앙, 산신제, 산신탱화, 산신각, 산신놀이(제주도), 산신교 등이 산신을 매개로 해서 생겨난 파생어들입니다. 이러한 파생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산신신앙과 산악숭배입니다.

산신 신앙은 산악을 신성하게 생각하여 믿음을 바치는 일련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산악숭배는 천지 및 천체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신신앙과 산악숭배가 자연숭배의 일단으로 상고대 북방계열의 사회에서 오래 전부터 지켜져 왔음은 중국측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계(三界)

첫째,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세계의 뜻입니다.

세 가지 미혹한 세계입니다. 중생은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계의 세계입니다.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3가지입니다. 생물이 사는 세계전체입니다. 생사 유전하는 미혹의 세계를 세단계로 나눈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사 유전하는 세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욕계(欲界)는 가장 밑에 있고 음욕, 식욕(食慾)의 2개의 욕심을 갖는 생물이 사는 장소입니다. 욕심이 번성한 세게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육취( 또는 6도)가 있고 욕계(欲界)의 천상(神들)을 육욕천(六欲天)이라고 합니다.

 (2) 색계(色界)는 욕계위에 있고 음욕과 식욕을 여윈 생물이 사는 장소입니다. 여기는 절묘한 물질(色)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색계라고 합니다. 욕심을 떠난 깨끗한 세계입니다. 사선천(四禪天)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것을 나누면 17천이 됩니다.

 (3)무색계(無色界)는 최상의 영역으로 물질을 초월한 세게입니다. 정신만이 존재합니다. 고도의 정신적인 세계. 물질을 싫어해 여의어 사무색정(四無色定)을 닦은 사람이 태어나는 장소입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훌륭한 요가에 들어 있습니다. 이 또한 천계(天界)에 속하지만, 이곳의 최고 장소인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 처(處) 천을 유정천(有頂天)이라 칭합니다.

 

삼보(三寶)

삼보(三寶)는 말 그대로 불교인이 의지하는 세 가지 보배입니다. 세 가지는 부처님(佛)과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法) 그리고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들(僧)입니다. 즉, 부처님, 법( 法: 진리), 승단입니다.

절에는 어느 절이나 불교에서 보배로 삼는 삼보가 갖추어져 있으나, 그 중에서도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절을 삼보사찰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삼보사찰은 통도사(佛寶), 해인사(法寶), 송광사(僧寶) 입니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삼보품(三寶品) 이 품은 제12권에 들어 있는데, 삼보란 부처님과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 그리고 불교교단, 이 셋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보를 믿고 정성으로 섬겨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세 가지 덕을 갖춘다는 것은 부처님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이며 불법이야말로 열반에 이르는 교의이며 불제자들은 가장 뛰어난 비구하는 것을 알고 삼보를 지극정성으로 받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부처님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세 가지 일에 관해 말합니다. 먼저 비구나 외로운 이에게 재물을 아낌없이 보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마음을 깨끗이 닦아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 중생과 함께 기뻐하는 마음과 중생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셋째는 지혜로써 거짓과 참, 선과 악을 살펴 욕심을 없애고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세 가지 병에 대해 설법하고 있습니다. 먼저 풍병과 담병, 냉병 등 육체적인 질병에는 꿀과 기름들이 약이지만, 탐욕의 병은 더럽다는 생각으로 다스려야 하고, 성내는 병은 자비심으로 고치며, 어리석은 병은 지혜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삼성각(三聖閣)

불전의 뒤쪽 한 컨에는 보통 사방 한 칸 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전각이 있습니다. 이전각 내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 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요하고 있습니다. 한 칸씩의 건물일 때에는 각각 산신, 독성 , 칠성을 따로 모시고 있으며 3칸의 건물일 때에는 삼성각이 됩니다.

 

서방정토(西方淨土)

서쪽에는 무수한 정토가 있는데 특히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말합니다. 극락국은 여기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십만억의 불국을 지난 곳에 있습니다.

 

수미산(須彌山)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입니다. 대해(大海) 속에 있고, 금륜(金輪) 위에 있으며, 그 높이는 수면에서 8만 요쟈나( 8만 4000유순(由旬, yojana)이며, 구산팔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주위를 해와 달이 돌고 육도(六道), 제천(諸天)은 모두 그 측면, 또는 위쪽에 있습니다. 그 정상에 제석천이 사는 궁전이 있다고 합니다.

 

시방(十方)

열 가지 방향(十方向)의 뜻입니다. 동, 서, 남, 북, 동남, 서남, 서북, 동북, 상, 하의 열 가지 입니다.

 

심우도(尋牛圖)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닫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禪畵)입니다.

그 과정을 10단계로 구분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 혹은 목우도(牧牛圖) 라고도 합니다. 심우도에는 송나라 곽암(廓庵)이 만든 것과 그와 같은 시대 보명(普明)이 만든 것의 두 종류가 있으나 한국에서는 곽암의 심우도가 주로 그려졌습니다.

 

십대제자(十大弟子)

부처님의 출가제자는 천여 명을 넘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이들 모두는 훌륭한 성자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수행과 지혜가 특출한 제자 10인을 간추려 십대제자(十大弟子), 또는 석가십성(釋迦十聖 ) 이라고 부릅니다.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마하가전연,아나율, 우바리 , 라후라, 아난다가 이들입니다.

여법(如法)

올바른 도리, 법에 맞고 이치에 맞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이렇게 나는 들었다'는 뜻으로, 여문여시(如聞如是)라고도 합니다.

경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붓다가 입적할 때 법문을 외어 지닌 것이 많았던 아난에게 모든 경전의 처음에 이 말을 두어 외도(外道)의 성전과 구별하도록 한 것에 의한다고 합니다. 여시는 경중에 설한 석존의 언동이며, 아문은 경장의 편집장인 아난이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염불(念佛)

부처님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으며, 부처님의 공덕이나 상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글자의 명호를 소리 내어 외는 것을 말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건 인과응보 때문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것이고 그 결과에 의해 벌을 받거나 아니면 상을 받거나 한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의 마음은 계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쉴 사이 없이 선과 악의 마음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중생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한 행동을 하면 좋지 못한 결과가 발생하고 선한 마음으로 착하게 행동하면 하늘이 도와 상을 내린다는 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자기가 지은 업, 즉 그 업이 악업이건 선업이건 천 마리의 어미 소를 풀밭에 풀어 놓아도 송아지가 자기의 어미 소를 찾아 가듯이 그 업은 세세생생 찾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응보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염주(念住)

염주는 바른 마음으로 머물러 흔들림이 없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듭니다.

첫째,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여도 기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正念)에 머무는 것입니다.

둘째, 중생이 부처님을 불신하여도 우울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입니다.

셋째,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기뻐하는 마음이나 우울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적멸보궁(五寂滅寶宮)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5처의 법당으로 오대산의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을 말합니다.

 

오행(五行)

오행은 오온을 말하기도 하고, <열반경>에서 설한 보살이 수행하는 5종류의 행법을 말합니다.

① 성행(聖行) : 계(戒), 정(定), 혜(慧)에 의해 수행하는 보살의 정행(正行)을 말합니다.

② 범행(梵行) : 깨끗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행(行)을 말합니다.

③ 천행(天行) : 하늘의 도리에 의한 묘행(妙行)을 말합니다.

④ 영아행 : 영아에게 대하듯이 자비의 마음으로 작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⑤ 병행(病行) : 괴로워하는 인간과 같이 고통이나 병을 보여주는 행입니다.

 

옴마니반메훔

 산스크리트어로는 om mani pa dme hum 이라고 합니다. <오! 연화위의 마니주여>라고 하는 기원의 뜻입니다. 라마신자가 부르는 주문입니다. 연화수 보살(padmapani)께 귀의하여 극락에 왕생학를 바라면서 부르면 죽은 후에 6도에 유전하는 제약을 벗어나는 공덕을 얻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 교도들은 연화수 보살이 아미타불과 같아서 극락연대에 기도하는 자를 구제하여 다음 생에 인과가 되는 무궁한 생사를 벗어나도록 함을 믿고 있으므로 승속을 불문하고 모두 입으로 부르며 마치 나무아미타불의 6자와 흡사합니다.

서장에는 관음경마니가보바(관음경마니가보바(觀音經摩尼伽步婆)에 시로써 6자 제목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 지혜, 해탈, 구제, 쾌락의 본원을 설하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6자 제목 가운데서 옴(唵: om)의 자를 한 번 부르면 그 공덕이 능히 사후에 천상계의 길에 유정함을 막고, 또한 마(ma)의 한 자를 부르면 악귀가 있는 수라도에 윤회함을 면하고, 니(ni)의 한 자를 부를 때에 인간계에 타어남을 막고. 반(pad) 의 한 자를 부르면 사람이 축생의 위치에 윤회하는 어려움을 제거하며, 메(me)의 한 자를 부르면 아귀도에 빠지는 고통을 벗어나며, 훔(hum)의 한 자를 부르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짐이 없는 공덕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옴(唵)'자는 천상계의 백색을 나타내고, '마'자는 수라도의 청색이 되며, '니'자는 인간계의 황색이 되고, '반'자는 축생도의 녹색이 되며 '메' 자는 아귀도의 홍색이 되고 '훔'자는 지옥의 흑색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유독이 제목을 창하면 비로소 공덕이 있어 곧 몸에 붙으며, 혹은 손에 가지거나, 집에 저장하면 생사해탈의 길을 얻는다고 합니다. 서장인이 흔히 이 6자를 긴 천조각 등에 써서 책궤 속에 저장하고 법륜(法輪)이라고 합니다.

 

왕생(往生)

다시 태어남, 윤회를 의미합니다.

염불 공덕으로 사후 아미타불의 정토인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담화(優曇華)

우담은 산스크리트어 udumbara의 음역입니다. 우담바라 꽃 입니다. 우담바라는 뽕나무 과의 무화과의 일종으로, 그 학명을 Ficus Glomerata 라고 합니다.

둥근 모양을 한 무화과나무입니다. 삼천년에 한번정도 꽃이 피는 나무라고 하며, 도 여래(如來)가 출현하고, 전륜왕(轉輪王)이 출현하면 꽃이 핀다고도 하며, 또 꽃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도 합니다. 경전 안에서는 희귀한 것에 비유합니다.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촉(付囑)을 받아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입니다.

따라서 많은 불교도들의 숭배를 받아왔습니다.

모습은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둘렀으며 보주와 석장을 들고 있습니다.

 

  

찰나(刹那)

우리의 말 중에 '찰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극히 짧고 빠른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찰나(刹那)는 불교용어 입니다. 찰나는 Ksana의 음역으로 찰나나 차나라고도 하고 일념(一念)이란 뜻으로 번역합니다. 찰나를 시간의 단위로 환산하면 1/75초가 된다고 하지만 이 시간은 보통의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단위 중에서 가장 짧은 단위입니다. 찰나(刹那) 에 대해서는 불교논서 <구사론(俱舍論)>의 이론과 <승기율(僧祇律)>의 이론이 자주 인용됩니다.

 <구사론>에 따르면 하루는 30모호율다(牟呼栗多)이고 1모호율다는 30납박(臘縛)입니다. 1납박은 60달찰나, 달찰나는 120찰나입니다. 이런 계산으로 현재의 일일 24시간, 한시간 60분, 일분 60초로 환산하면 0.013초에 해당합니다.

 <승기율>의 계산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20념(念)이 1순(瞬)이고, 20순이 1탄지(彈脂), 20탄지가 1납박, 20납박이 1수유(須臾), 30수유가 하루라는 계산입니다. 따라서 <승기율>의 시간 계산으로는 1념이 0.018초라고 하니 1찰나의 시간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찰나는 시간관념에서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대비바사론>에 그 찰나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가는 명주 한 올을 젊은 사람 둘이서 양쪽 끝을 당기고 칼로 명주실을 끊었더니, 명주실이 끊어지는 시간이 64찰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은 적어도 120찰나쯤이 되어야 감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찰나가 얼마나 짧은 시간을 말하고 있는 지 짐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120찰나는 단찰나라고도 하며 시간으로 약 일의 오분의 삼초 정도 된다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찰나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며, 찰나삼세라고 합니다.

한역한다면 염(念), 염경(念頃;한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일념(一念), 발의경(發意頃) 혹은 생장(生藏)이라 하며 간단하게 염이라고 합니다. 극히 짧은 시간, 순간, 시간의 최소단위를 말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람이 손가락을 한번 튀기는 사이(一彈指時)에 65찰나를 계산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탄지시의 65분의 1을 1찰나라고 합니다.

이 밖에 찰나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살펴보면,

첫째, '인왕반야경'권상 관용품에는 90찰나를 1념 이라 하고, 1찰나에 900번의 생멸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둘째, '대지도론'권30, 권83에선 60념을 1탄지로 삼고, '구사론'권12에선 65찰나를 1탄지로 간주합니다.

셋째, '대반야경'권347에선 하루, 낮, 반나절, 한 시간, 식경(食頃), 수유, 아이(俄爾), 순식경(瞬食頃)의 순서에 의하며 1식경(아침 먹는 사이)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의 길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찰나에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계속적인 생멸현상을 찰나생멸이라고 합니다. 사물의 무상한 궁극적인 모습을 일기(一期)생멸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1찰나를 현재라 하고, 전찰나를 과거, 후찰나를 미래라 하며, 이 셋을 합하여 찰나 삼세(三世)라 합니다. 시간의 개념을 구체화시키기 휘한 불교도의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느낌은 주관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자체가 사고를 범주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참회(懺悔)

참(懺)은 산스크리트어 ksama의 음역으로 용서를 청하는 것이며, 회(悔)는 ksama의 의역으로 후회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남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지어 온 잘못은 물론 현재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지은 모든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부처님 앞에 맹세하는 것을 참회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참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계(戒)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규제되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다스리는 자율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참회하고 나서 자신의 원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내밀한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용서를 청하는 겸허한 태도입니다. 이는 부처님께 향하는 거짓 없는 마음의 나타냄인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의 마음의 자리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남이 강제로 시킨다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의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참된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욕이며 갈망이라고 합니다.

참회의 의식에는 포살과 자자가 있고, 그 방법으로는 사참과 이참이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제자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대중 전부를 모아 참회하고 죄를 뉘우쳐 바른 수행의 길로 이끄는 것이었으며, 이 참회의 의식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참회는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로 일상생활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참회는 참(懺)과 회(悔)로 분리해 파악해야 합니다. '참'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참는 것이고 회는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부처님과 보살님 또는 스승과 윗분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 다음 사죄를 구하는 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삼십칠조도품의 마지막 수행도로서 중도의 완전한 수행법이므로 성스러운 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定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새김(正念), 바른 정신통일(正定)의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행(行)

행위, 행업(行業)의 뜻입니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행과 입으로 짓는 행과 뜻으로 짓는 행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신구의(身口意) 삼행(三行)이라고 부릅니다.

행(行) 은 행위의 뜻으로 무명으로 말미암아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