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예절

예의범절(禮儀凡節)이란

그 실다운 내용인 바르고 겸허한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한갓 번거로운 형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그 내용이 형식에 부합한 경우에 예의범절(禮儀凡節)은 곧 마음의 거짓 없는 표현이 됩니다.

또한 바르고 겸허한 행동 가짐이 곧 바르고 겸허한 마음을 낳기도 하는 것이므로, 우리 불자들은 안으로 깊이 마음을 살펴 정진함과 아울러 밖으로 의연하면서도 부드러운 예법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법당예절(法堂禮節)

일반 사찰에서는 법당(法堂)에 들어서면 가운데 상단이 마련되어 있어서 불보살님들을 모시었고, 그 좌우에 신중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상단의 주좌를 기준으로 가운데 통로를 어간(御間)이라 하고 법당의 정면 벽으로 난 가운데 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합니다.

법당에 들어설 때는 측면으로 난 문을 이용하거나 어간문(御間門)이 아닌 좌, 우 가장자리 쪽의 문을 이용하여야 합니다.

부처님 전에 향이나 초를 공양하기 위하여 향과 초를 준비한 경우에도 이미 촛불이 켜져 있거나 향이 사리어져 있으면 향과 초를 그대로 부처님 전에 올려놓는 것으로 공양(供養)을 대신하여야 합니다.

자리에 서게 되면 먼저 부처님 전에 삼배(三拜)를 올립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1)의 삼배(三拜)를 올리기 전에 반배(半拜)를 먼저 하고 큰절로 삼배(三拜)합니다. 삼배의 마지막 절을 마치고는 고두배(叩頭拜)2)를 올리며, 세 번째의 절을 모두 마치고는, 다시 합장(合掌) 반배(半拜)를 합니다.

절을 한 다음에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마음자리를 觀합니다. 법당에서 나올 때에는 먼저 법당 안에 다른 법우님이 남아있게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법당을 나오게 되어서 법당 안에 사람이 없게 되는 경우에는 촛불을 끄고 각 기물을 확인하여 화재 등의 예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법당을 나올 때도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합장(合掌) 자세로 법당의 옆문으로 와서 상단의 부처님 전(前)에 합장(合掌) 반배(半拜)한 후 뒷걸음으로 법당 문을 나옵니다.

  

절(拜)하는 법

삼배(三拜)라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 스승의 마음, 자기의 마음에다 모든 것을 다 같이 넣고 굴려서 합장 경배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마음과 둘이 아닌데다가 일 배(一拜)를 올리고 둘 아니게 행하며 돌아가는데다 일 배(一拜)를 올리는 것입니다.

 

 반배(半拜)하는 법

 합장(合掌)은 손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모으고 나아가서 육체와 마음이 둘이 아니며,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그러므로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합장은 두 손바닥과 열 손가락을 합하여 어긋나거나, 벌어지지 않게 합니다. 손목은 가슴에서 5cm 정도 떨어지게 하여 45도 각도로 세우고 양쪽 팔꿈치가 거의 직선이 되도록 합니다. 손끝을 향하도록 자연스럽게 세우며 고개는 반듯하게 합니다. 위와 같은 자세로 허리와 머리를 60도 정도 숙여서 공손히 반절하는 것을 반배(半拜) 또는 합장례(合掌禮)라고 합니다.

  

반배(半拜)는 이럴 때 합니다.

*절문을 들어설 때

*법당에 들어가거나 나오기 전

*불단 앞에서 헌화를 하거나

*향, 초 그 밖의 공양물을 올리기 직전과 올린 후 삼배나 108배 등의 오체투지를 마친 후 반배를 합니다.

*스님이나 법우를 만났을 때 반배로서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줍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

① 합장한 자세로 반배를 한 다음, 무릎을 꿇고 이마가 닿을 지점에 두 손을 나란히 짚으면서 엎드립니다.

② 무릎을 꿇고 엎드릴 때 오른발이 밑으로 왼발이 위로 가도록 포갭니다.

이때 두 무릎 사이는 한 뼘 띄우고 양 팔꿈치는 양 무릎에 닿게 합니다.

③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동작으로 손을 뒤집어 귀 아래까지 들어 올립니다.

④ 머리를 들고 허리를 일으켜 세우면서 본래의 합장 자세를 취합니다.

⑤ 일어설 때에는 오른손으로 바닥(무릎)을 짚고 일어나 두 번을 반복합니다.

삼정례의 마지막 절을 할 때는(세번째 – 고두배(고두례)) 엎드린 채 고개와 두 손만을 들어 합장하고 자신의 발원(發願)을 觀합니다.

⑥ 다시 절하고 일어납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는 자신(自身)의 아만심(我慢心)과  교만(驕慢)을 물리쳐 자신(自身)을 낮추는 하심(下心)과 삼보(三寶)에게 존경심(尊敬心)을 표(表)하는 최고(最高)의 공경법(恭敬法)입니다.

 

예불문(禮佛文)의 마지막 구절인 <유원 무진 삼보…>에서 발원(發願)하는 절이라 하여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합니다.

삼배를 올리고 나서 마음속으로 깊이 둥글려서 주인공에다 일임하십시오.

법당에 들어와서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부처님모습에다 다 융합을 시키고, 또 법당에서 나갈 때는 언제나 나한테 융합을 시켜서 같이 가져나가라는 것입니다.

항상 뭘 보거나 듣거나 그러면 벌써 같이 더불어 생각하고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말이 나오고 알게 되는데 이 생각을 정신계와 물질계가 같이 굴려야 옳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상을 볼 때 처음에는 형상으로 보다가 나중에는 참부처님으로 보고 공심인 공법으로써 용무를 하시는 진짜 부처님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천차만별의 일을 할 수 있을 때 평화스러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도량예절(道場禮節)

경내예절(境內禮節=사찰예절(寺刹禮節) 도량예절(道場禮節)

 절의 입구(入口)인 일주문(一柱門)에서 합장반배(合掌半拜), 부도탑(浮屠塔)에서 반배(半拜), 순차적(順次的)으로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 해탈문(解脫門)을 지나면서 반배(半拜)한 후 여러 문(門)을 지나 절마당에서 중심건물(中心建物)인 대웅전(大雄殿)을 향(向)해 반배(半拜)를 합니다.

 탑전(榻前)에서 반배(半拜)를 하고, 경내(境內)에서 스님이나 도반(道伴)을 만나면 반배(半拜),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한 전각(殿閣) 중앙문(中央門)인 어간문(御間門)을 피(避)해 좌우측(左右側)으로 들어가 향(香), 초(燭)를 켜고 오체투지(五體投地) 삼배(三拜)와 나올 때 반배(半拜)하는 것이 예의(禮儀)입니다.

 

 스님과의 만남​

스님은 속세(俗世)를 떠나 부처님께 귀의(歸依)한 승보(僧寶)로 인간적(人間的) 지식(知識)이나 나이를 따질 수 없으며, 마땅히 삼보(三寶)로서의 예(禮)를 갖추어야 합니다.

출가(出家)한 것만으로도 존경(尊敬)하고, 예경(禮敬)하여야 합니다.

이는 남을 존경(尊敬)하면 스스로를 존경(尊敬)하는 이치(理致)와 같습니다.

 스님을 경내(境內)나 길에서 만나면 합장반배(合掌半拜)의 예(禮)를 갖춥니다.

기타(其他) 스님이 좌선시(坐禪時), 설법시(說法時), 세면시(洗面時), 공양시(供養時), 목욕시(沐浴時), 해우소(解憂所)나, 누워계실 때는 절(拜)하지 않습니다.

 스님 방(房)에 들어갈 때는 법당(法堂)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행동(行動)하면 됩니다.

들어갈 때 반배(半拜)를 하고, 들어가서는 삼배(三拜)를 하며, 나올 때 반배(半拜)의 예(禮)를 올립니다.

 

 법우(法友)와의 만남

불교(佛敎)안의 인연(因緣)은 친구이상(親舊以上)의 의미(意味)가 있어 서로 법우(法友)라고 부르며, 또는 선우(善友), 도반(道伴) 이라고도 합니다.

법우(法友)란 부처님의 바른 법(法)을 함께 배우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슬픔(悲)과 기쁨(喜)을 함께 하고 서로의 수행(修行)을 도와주는 진리(眞理)의 친구(親舊)를 뜻합니다.

그래서 법우(法友)라는 의미(意味)를 새기며, 법명(法名)이나 “법우님(法友任)”이라고 부르는 습관(習慣)을 기르는 것이 좋습니다.

경내(境內)에서 마주치게되면 서로 합장(合掌) 인사(人事)를 합니다.

 

 ※ 합장(合掌) :

두 손바닥(掌)을 마주 합(合)하는 자세(姿勢)로, 이는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며, 또한 상대방(相對方)에 대(對)한 존경(尊敬)과 공경(恭敬)의 표시(表示)입니다.

 한편 오른손은 불계(佛界), 왼손은 중생계(衆生界)를 상징(象徵)합니다.

그래서 합장(合掌)의 의미(意味)에는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의미(意味)가 있습니다.

 

 ※ 차수(叉手) :

두 손을 자연(自然)스레 아래위로 교차(交叉)하여 포갠 손 모양(貌樣)으로, 경내(境內)에서 걸어 다닐 때 취(取)하는 자세(姿勢)입니다.

 하지만, 현재(現在) 선방(禪房)에서 경행시(輕行時)의 차수(叉手)만 보게 되는 실정(實情)입니다.

 

⊙ 항상 밝은 미소로 스님이나 불자끼리 만났을 경우 합장(合掌)하여 인사합니다.

⊙ 법당 안에서는 목탁을 친다거나, 종을 쳐서는 안 됩니다.

⊙ 도량(道場)에서는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 양손을 손가락 부분이 서로 교차되게 하여 배꼽 아래 단전에 대면 바로 차수(叉手)의 자세가 됩니다. 이것은 밖으로 향하는 여러 의식들을 차수를 통하여 나의 내면으로 귀의(歸依)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사찰에 있는 모든 물건은 삼보의 귀중한 공용물이므로 소중히 하며 항상 제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법회예절(法會禮節)

재(齋) 또는 법회(法會)

​​불교(佛敎)의 모든 의식(儀式), 예불(禮佛), 헌공(獻供), 법회(法會), 천도재(薦度齋), 예수재(預修齋), 수륙재(水陸齋)等을 통칭(通稱)하는 말입니다.

  

법회순서(法會順序) 

삼귀의(三歸依), 반야심경(般若心經), 청법가(請法歌), 오체투지(五體投地), 입정(入定), 법문(法門), 사홍서원(四弘誓願), 회향(廻向)이 일반적(一般的)인 순서입니다.

호궤합장(胡(互)跪合掌) 또는 장궤합장(長跪合掌)

포살(布薩)과 자자시(自恣時) 또 수계의식(受戒儀式) 때나 발원문(發願文) 낭독시(朗讀時) 무릎(膝)을 땅(바닥)에 대고 두 정강이를 똑바로 세우고, 손(手)은 합장(合掌)의 자세(姿勢)를 취(取)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슬착지(右膝着地) 

오른(右)쪽 무릎(膝)을 바닥에 대고 왼(左)쪽 무릎(膝)을 세운 채로 예(禮)를 올리거나, 그와 같은 자세(姿勢)로 앉는 것을 우슬착지(右膝着地)라 합니다.

오른(右)쪽 무릎(膝)을 바닥에 대기 때문에 “우슬착지(右膝着地)”라 하지만, 피로(疲勞)할 때에는 왼(左)쪽 무릎(膝)과 교대(交代)하여 자세(姿勢)를 취(取)할 수 있습니다.

 

 경전(經典)

경(經)을 보되 그 경(經)에서 참뜻을 놓치는 사람은 마치 창밖의 꽃을 보고 유리에 머리를 부딪쳐 죽는 벌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강을 건너신 분들의 뗏목, 즉 가르침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뗏목들은 강 이쪽의 것이 아니라 강 저쪽의 것입니다. 손짓을 해서 부른다고 건너편 뗏목이 내 앞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각자의 뗏목을 스스로 만들어 건너야 합니다. 나의 뗏목이란 무엇인가? 내 참 마음이 나의 뗏목입니다. 모든 것을 나의 근본에다 맡기고 가는 것이 나의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

경전은 삼보 가운데 하나인 법보이며, 부처님의 진리가 담긴 책으로 항상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경전(經典)에 먼지나 더러운 것이 묻어 있을 경우 입으로 불어 털지 말고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아내야 하며 더러운 손으로 만져서도 안 됩니다.

경전(經典) 위에 다른 책이나 물건을 함부로 올려놓지 말며, 항상 높고 깨끗한 곳에 잘 간직합니다.

  

공양(供養)

육법공양(六法供養)

지계(持戒)·지혜(智慧)·인욕(忍辱)·선정(禪定)·보시(布施)·정진(精進)을 의미하는 향(香)·등(燈)·꽃[花]·차[茶]·쌀[米]·과일[果]의 여섯 가지를 불전(佛殿)에 공양(供養)하는데, 그 의식을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 하고, 그 물품을 육대공양물(六大供養物)이라 합니다.

 향(解脫香)은 제 몸을 태우면서 자유의 몸이 되어 날아가서 바로 해탈을 상징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태우면서 향기를 뿜어 이웃을 맑게 하니 이는 바로 불교의 정신입니다. 향은 본래 고온다습하여 체취가 많은 인도에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등(般若燈)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등불이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듯 지혜는 불투명한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중생을 무명(無明)의 어둠에서 제도하려는 부처야말로 등불과 같은 존재이니 부처의 도량(道場)을 밝히는 등불 공양은 촛대에 초를 공양하는 형식으로 치러집니다.

 꽃(萬行花)은 극락이며, 만행(萬幸)의 상징으로 경전(經典)에 묘사된 극락세계(極樂世界)는 마당이 칠보(七寶)로 덮여 있고 여러 가지 꽃들로 향기가 그윽합니다. 그래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바라는 중생(衆生)들은 꽃으로 극락 같은 환경을 만들어 부처를 공양하는 것입니다. 온갖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딘 후에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깨달음을 성취(成就)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修行)을 해야 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꽃비가 내리면 모든 중생이 해탈한다고 하며, 부처가 탄생할 때 용왕들이 만다라 꽃을 뿌려 이를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가 공양의 기본으로 이를 3대 공양 혹은 기본공양이라 하고, 향을 담는 향로와 등을 밝히는 촛대, 꽃을 담는 꽃병을 가리켜 불단 3구족(三具足)이라 합니다.

 그리고 차(甘露茶)는 맑고 신성한 성질을 가진 음료로 맑은 정신과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는 수행자들이 마시기에 적당하여 부처의 법문을 상징하고, 과일(菩提果)과 쌀(禪悅米)은 일용(日用) 양식으로 기쁨을 상징합니다.

 

 향(香) 공양

 초를 켜서 무명(無明)을 사르고 나면 다음에 향공양을 올립니다.

전체가 여여(如如)하고 밝을 뿐이니 향공양을 올려서 향 내음이 두루할 때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 향 내음으로써 전체가 하나도 빠짐없이 공식을 삼게 됩니다. 향 세 개를 꽂는 것은 한 개비가 세 개비가 되고 세 개비가 한 개비가 되어 초월되어 공해서 돌아가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세(三世)가 일체(一切)가 되고 일체(一切)가 삼세(三世)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과거 생이나 미래 생이나 현재 생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모두 그 향내를 맡고 다 배가 부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마음의 양식이 그렇게 공식으로만 돌아갈 수 있는 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향도 내 마음의 향입니다. 내가 모든 유생, 무생과 부처님들을 다 모시고 있는 이 내공에 마음의 향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부처님 마음과 더불어 같이 그 향기가 우주 법계를 싸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이나 우리의 그 많은 마음들이 한데 합쳐서 공해서 우주를 만들고 지구를 만들고 그 안에 우리의 한데 합친 마음들이 바로 정원을 꾸민 것입니다. 그러니 향 하나를 꽂는다 해도 마음속으로 모두를 한데 합쳐서 예를 올린다면 모두 함께 더불어 같이 꽂게 되는 것이고, 몸뚱이는 예배를 하고 이 합쳐진 한마음은 예를 받게 됩니다. 향 한 개비 불을 붙일 때 불의 심지가 내 마음인 줄 알아야 하고, 부처님 마음인 줄 알아야 됩니다. 몸뚱이가 불을 켜지 않으면 어떻게 따뜻한 기운이 나오고, 어떻게 빛을 비칠 것인가. 마음으로만 켠다면 잘 켜질 것이지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안팎이 없이 켜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자기 자성 불에게 우주를 덮고 있는 포괄된 자성 불에게 예(禮)를 하고, 자기 몸뚱이와 사량은 배(排)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세계인 유위법이나 무의 세계에 치우침 없이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말고 마음 생각 하나를 잘 돌려야 합니다.

 

 초 공양

 초를 켜는 것은 곧 내 마음의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를 켜는 것은 내 마음의 불을 켜는 것을 방편상 보이게끔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가오는 대로 집어삼켜서 두지 않고 삯인다는 것은 초를 켜면 제 몸을 태워 녹이는 것과 같습니다. 촛불을 켜는 것은 “주인공에다 몰입을 해서 거기다 놓아라. 잘된 것이든 잘못된 것이든 모든 것을 감사하게 놓고 또 거기서만 할 수 있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거수일투족 전부 놓이라는 것입니다.

  

꽃 공양

 마음으로서 상징되는 것이 꽃입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시는 것을 보고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자기 얼굴로서 꽃을 피운 것과 같습니다. 꽃 공양이란 꽃을 그냥 올리는 것이 아니라 공양, 즉 두루하다는 뜻입니다. 꽃 공양은 마음의 꽃이 되어야 합니다. 꽃잎이 지면 열매가 열리듯이 꽃과 과일은 항상 짝입니다. 꽃 하나 꽂아 놓는 것도 자기 마음을 갖다 놓는 것과 같습니다.

 

 과일 공양

 꽃 공양, 즉 마음의 꽃을 피운 다음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일 공양이 다음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지각색의 과일이 제 나무에서 스스로 무르익어서 일체 중생을 먹이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꽃 공양을 진짜 믿고 올리면 그 향기가 온 누리에 퍼지며, 꺾였으니 그 꽃이 시들면 마음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열매는 마음이고 그 줄기는 몸이라 꽃나무가 제 나무에서 열매가 무르익는다면 그것은 온 누리에 모든 사람을 다 먹이고도 도리어 남는다는 것입니다.

  

차 공양

 다기(茶器) 물은 우리 마음의 그 모든 오욕을 다 깨끗이 씻어 내는 청수(淸水)로서 비유합니다.

다기(茶器) 물을 한 바다로 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을 우리가 거기다 놓고 간다면 강물, 지하수, 다 모이게 되어서 바닷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한 군데 몰락 놓으라는 뜻과 같습니다. 바다의 물은 수증기로 올라가서 정화를 해서 정수로 다시 내리게 되고 모든 생명이 다 평등하게 안 먹는 것이 없는 공법으로 다시 배출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생수라는 것은 항상 자기 마음의 오욕을 씻어내고 욕심과 집착을 씻어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기를 올렸을 때 그것이 바닷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행을 한다는 뜻인 겁니다.

내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찰라화(札剌化)해서 나누면서 보살(菩薩)로, 응신(應身)으로 화(化)해서 일체(一切) 만물만생(萬物萬生)에게 다 이익이 가게끔 우주상 보시(普施)를 한다는 것입니다.

 

공양(供養)

 공양(供養) 한 그릇 놓는 것의 의미는 우주(宇宙) 삼세(三世)를 전부 합쳐서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하나 닥치는 대로 가는 것 잡지 말고, 오는 것 마다 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라는 소리입니다.

나를 수 억겁(億劫) 전생에서부터 형성시켜온 장본인한테 잘된 것, 잘못된 것, 모두 다 놓고 믿고 맡기라는 그 뜻입니다.


1)오체투지(五體投地)에 내포(內包)된 의미(意味) :

 찬탄삼보(讚歎三寶), 참회업장(懺悔業障), 권청(勸請), 수희(隨喜)​​, 회향(廻向).

2)고두배(叩頭拜)란 삼배(三拜)에 대(對)한 아쉬움의 표시(表示)이며, 지극(至極)한 존경심(尊敬心)에 대(對)한 여운적(餘韻的) 표현(表現)이다.

고두배(叩頭拜)는 절(拜) 마지막에 이마를 바닥에서 떼고 난 後에 잠시(暫時) 합장(合掌)하고 바로 이마를 땅에 대고 양손을 올리며 절(拜)을 한다.​

고두례(叩頭禮)라고도 한다.